Column

朴婉緖の「測り難きは人の心」の中で

 

 他人を非難したり、いじめたりする際に 表裏がある、表裏不同であるという言葉を使うことがある。 侮辱的な言葉で裏では言うことができても、仮にそんなことを直接言えばビンタされる羽目になる 。しかしそれは表と裏がないことを意味するのか?良い意味でよく使われる外柔内剛という言葉にしても、結局のところ表と裏が違うということである。それなのに外柔内剛という言葉を悪口にしないのは、表と裏の相違が強さと柔軟さにあることであって、善と悪にあるのでないからであろう。表裏不同であるという言葉は偽善者には使うが、偽悪者にはほとんど使わない。表というのは外にあらわれる言動を意味し、裏というのは他人が簡単に分かることができない心を言うのである。そういった意味でも、果たして表と裏が全く同じ人がいるのだろうか。二重性こそ最も人間的な、人間のみの属性ではないだろうか。裏という中身も数えきれないほど何重にも重なっている。測り難きは人の心こころと言う通りである。誰も人の深淵の底を見た者はいない。

 表裏があるより酷い言葉で人面獣心という言葉がある。人の顔をしているが心には獣のような考えを持っているという意味である。おそらく獣がこれを聞けば侮辱を受けるはずだ。獣がどのようにして、悪しき、かつ狡猾な人の心の真似事ができるだろうか。人間の人間らしさとは、悪い心を抱かないのではなく、頻繁に沸き起こる悪い思いを反省し、それを治めて、純化させることができる力であるものであり、そして最終的には、泉のようにきれいで優しい心だけが残ることを願う、希望と理想を持つことにあるだろう。

朴婉緖 散文集8「測り難きは人の心」中

 ’悪の平凡さ’を述べたハンナ・アーレントは、『人間の条件』で人間の本性と人間の条件は一致するものでないことを前提として掲げた。そういえば悪の本性に基づいて生き、虚しい本能に沿って生きる人間に対して、人間らしいとは言わない。確かに”二重的な人間だ”という指摘は、心に刺さる痛ましい言葉であるが、誰でも二重的にならざるを得ないのは、我らにある本性がそうだからである。しかし「人間の条件」を満たすためには、そこにとどまるだけではいられない。反対にこう考えることができないだろうか?善において二重性というのは悪であるため偽善になり得るが、その一方で、悪において二重性というのは、あわれみと慈悲になることもあるはずである。その場合、二重性というのは嬉しいことではないか。朴婉緖さんが言うように’悪い心を抱かないのではなく、頻繁に沸き起こる悪い思いを反省して、それを治め、純化させることができる力’という言葉に変えれば、悪を逆らって立ち上がる善の二重性、すなわち悔い改めの心の機会を逃さないで善に向かって行くことになるだろう。このように二重性という人間の本性を人間の条件に積極的に活用しようではないか。

 

박완서의 『한 길 사람 속』에서

 

 남을 비난하거나 소외시킬 때 쓰는 말로 그 사람은 속 다르고 겉 다르다는 말이 있다. 못 듣는 데서나 할 소리지 만약 듣는 데서 직접적으로 그런 소리를 했다가는 뺨 맞기 알맞는 모욕적인 소리이다. 그럼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속과 겉이 다르지 않은가? 좋은 의미로 쓰는 외유내강이라는 소리만 해도 결국은 겉 다르고 속 다르다는 얘기다. 그러나 외유내강이 욕이 되지 않는 것은 속과 겉의 다름이 강하고 부드러움이 있는 것이지, 선과 악에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속 다르고 겉 다르다는 말은 위선자라는 소리고 위악적인 사람에게도 거의 쓰지 않는다. 겉이란 밖으로 드러나는 언행을 말하고 속은 남이 쉽게 알 수 없는 마음을 말하는데 과연 속과 겉이 같은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이중성이야말로 가장 인간적인 인간만의 속성이 아닐까. 속도 한 겹만 있는 게 아니라, 자신도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겹을 가지고 있다. 오죽해야 예로부터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일컬어져 왔을까. 아무도 인간이란 심연의 바닥을 본 사람은 없다.

 속 다르고 겉 다르다는 말보다 더 지독한 말로 인면수심이란 말이 있다. 멀쩡하게 인두겁을 쓰고 속으로는 짐승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뜻인데 짐승이 들으면 모욕감을 느낄 것이다. 짐승이 무슨 수로 인간이 수시로 품는 악하고 독하고 교활한 마음을 흉내라도 낼 것인가. 인간의 인간다움은 나쁜 마음을 품지 않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수시로 동하는 나쁜 마음을 반성하고 다스리고 승화시킬 수 있는 능력에 있는 것이고, 그리하여 마침내는 샘물처럼 곱고 착한 마음만 우러나기를 바라는, 소망과 이상으로 갖는 데 있을 것이다.

박완서 산문집 8『한 길 사람 속』중에서

 ‘악의 평범성’을 말한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이라는 책에서 인간의 본성과 인간의 조건은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고 전제했다. 하긴 누구도 악한 본성에 따라 살고, 허무한 본능을 따라 사는 사람을 사람답게 산다고 말하지는 않을 테니까. 이중적이라는 지적은 우리의 마음을 찌르는 아픈 것이지만 누구나 이중적일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가 가진 본성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거기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역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선에 대한 이중성은 악이기 때문에 위선을 만들겠지만, 한편 악에 대해서 이중성은 긍휼과 자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럴 경우에 이중성은 반가운 것이 된다. 박완서 선생이 말하듯 나쁜 마음을 품지 않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수시로 동하는 나쁜 마음을 반성하고 다스리고 승화시킬 수 있는 능력, 이 문학의 언어를 설교의 언어로 바꾼다면 악을 거슬러 일어나는 선한 이중성 즉 회개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선을 향해 나가는 것이다. 이중성이라는 인간의 본성을 인간의 조건에 적극 활용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