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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3:1-11

 

오랜만에 사도행전 강해로 돌아왔습니다. 지난 11월까지의 설교를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난동을 일으켜 바울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다행히 바울은 로마 군대의 도움을 받아 겨우 죽임을 면하게 되지요. 유대인들은 대단히 흥분한 상태였습니다. 천부장 입장에서는 민심을 다스리지 못하고 폭동이라도 일어나면 문책을 당할 것입니다. 동시에 로마 천부장은 바울이 로마시민권자인이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함부로 다를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 로마시민의 권리를 저해하는 것은 중대한 범죄였기 때문입니다.

 

이 두 곤란한 상황에서 천부장은 어떻게 하든 문제의 원인을 확인해야 했기 때문에 다음날 아침 일찍 유대인들의 대표로 구성된 공회를 소집했습니다. 이 공회라는 것은 산헤드린 공회인데 바울 자신도 이 산헤드린 공회의 의원 출신입니다. 예수를 믿은 후에 그것을 버리고 오히려 공회가 대적하는 예수의 전도자가 되었지요. 로마 제국은 효과적인 식민지 지배를 위해서 점령지에 자치정부를 허용했습니다. 이스라엘에도 허가된 자치정부가 있었는데 그것이 산헤드린 공회입니다. 산헤드린 공회라는 것은 로마 지배 안에 있기는 하지만 유대 안에서는 종교기관으로써만 아니라 정치와 행정까지 포함하는 광범위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유대차지정부였습니다.

 

오늘 본문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그 산헤드린을 구성하는 주요 세력입니다. 그들이 바울을 압도하려는 기세가 컸기 때문에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지혜로운 말을 합니다.-23:6 바울이 그 한 부분은 사두개인이요 한 부분은 바리새인인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가로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을 인하여 내가 심문을 받노라-바울이 바리새인이라는 것은 거짓이 아니고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고 있는 것도 거짓이 아니므로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다지 특별하지 않은 것 같은 바울의 발언에 공회가 갑자기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합니다.-23:7 그 말을 한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이니 23:8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 23:9 크게 훤화가 일어날새 바리새인 편에서 몇 서기관이 일어나 다투어 가로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악한 것이 없도다 혹 영이나 혹 천사가 저더러 말하였으면 어찌 하겠느뇨 하여 23:10 큰 분쟁이 생기니… -바울의 말에 두 파 사이에 싸움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이나 천사나 영을 믿지 않았습니다. 몸이 죽을 때 영혼은 파멸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반대로 바리새인들은 이것들을 다 믿었기 때문에 이들의 종교적 전통과 신념은 서로 달랐습니다.

 

바울은 이 주제, 즉 서로 다른 전통과 신념에 불만 붙이면 항상 서로 죽일 기세로 싸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기가 막힌 전술입니다. 서로 싸우게 하고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그들끼리 싸우게 하라. 그러면 아무도 나에게 대항하지 못하리라.” 『군주론』에서 마키아벨리가 한 말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통해 공회에 싸움을 붙였고 로마군대는 바울을 안전한 영문 안으로 다시 피신시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한 때는 하나의 목적으로 위해 이견없이 협력한 적도 있었지요.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할 때는 그랬습니다. 그런데 다시 자신들만의 교리와 신념, 감정 싸움으로가지 번져서 충돌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신학적 문제는 부활을 믿는가, 영의 세계를 믿는가, 천사의 존재를 믿는가 였습니다. 종교사회에서 중요하지 않은 문제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지금 바울에 대한 문제가 더 시급하게 중요한 것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 상황에서 천사와 부활 문제로 분란을 일으키는 것은 어떻게 보아도 어리석은 일입니다.

 

이와 비슷한 역사적 사례가 있습니다. 지금 터키의 수도인 이스탄불은 이전에는 콘스탄티노플이라고 불렸지요. 로마와 함께 중세 기독교의 최고의 도시입니다.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공인한 콘스탄티누스가 세운 도시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야 할 도시입니다. 그런데 이곳은 1453년 이슬람 군대에 의해 포위되었습니다. 도시 전체의 근간은 전통적으로 기독교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무너지고나면 이슬람의 지배를 받아야하는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 때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사제들이 모여서 회의를 했습니다. 그 회의의 주제는 마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논쟁을 이어받은 것 같습니다. 주제는 이것이었습니다. 천사는 남성인가 여성인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천사의 존재를 믿는가에 문제로 싸웠지만 1400년 후에는 중세교회는 천사가 남성인가 여성인가의 문제로 싸웠습니다. 그 논쟁이 치열하여 결론이 안 나오니까 다음 주제로 바뀝니다. 성모 마리아 상을 만들었는데 마리아 눈 알의 색을 무슨 색으로 칠할 것인가. 성수(聖水)에 파리가 빠져 죽었습니다. 여러분도 이 문제에 한 번 답해보십시오. 그러면 성수가 더러운 파리에 의해 오염된 것입니까? 파리가 성수에 젖었으니 파리가 성화(聖化)된 것입니까? 이런 언어유희를 신학적 과제로 삼고 싸우고 있었습니다.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재미있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문제의 본질과 전혀 상관없는 말장난인 것이지요. 종교는 그럴 수 있습니다. 종교는 상황에 맞지 않는 비상식을 범하기 쉬운 존재이니까요. 저 같으면 파리와 물은 버리고 파리가 들어오지 못하게 방역을 했을 것 같입니다.

 

그로부터 600년 뒤입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때 러시아에서 기독교의 뿌리가 통째로 뽑힐 때 모스크바에서 사제들이 모여 회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논쟁의 주제는 사제의 가운 색깔이었습니다. 무슨 색의 가운을 입을 것인가. 그리고 축도할 때 손가락을 어떤 모양으로 펼 것인가에 대해 두 시간 반 이상을 싸웠다는 구체적인 기록이 있습니다. 이쯤 되면 그 시대의 교회가 이슬람에 의해서 공산주의에 의해 무너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폭입니다. 스스로 무너진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알지 못하고 종교적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사회적 상식을 버리고 세상과 소통할 언어를 가지지 못하고 고립되면 결국 사회에서 설 자리를 앓게 됩니다. 세상의 흐름을 읽어내고 변화하지 않는 교회는 결국 소멸합니다. 그것이 현대의 신학이 말하는 상황화입니다. 교회가 세상의 상황과 문맥을 이해하지 못하면 결국 선교할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합니다. 그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엡1:22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엡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그리스도가 머리라면 판단과 결정을 그리스도가 하시고 신경을 통해 각 부분에게 그 생각과 뜻을 전달하시겠지요.-고전12: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그 각 부분이 머리의 생각을 실행한다면 하나님의 교회는 결코 타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결코 망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문제는 100년전의 상황에 주신 것을 지금도 그대로 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처럼 변화하지 않습니다. 지금 여기, 즉 이 시대, 이 지역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지 않을 뿐더러 순종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머리 되신 하나님의 교회가 아닌 형식적 전통에만 집착하는 종교단체는 결국 타락하고 망하게 될 것입니다. 100년전의 신학에서 조금만 다른 것을 말하면 이단이니 자유주의니 하는 이름으로 거부하고 무시해 버립니다. 그런 죽은 지식을 신념으로 하는 폐쇄적인 교회에는 시대를 선도할 소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말씀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변하는 시대에 따라 아니 매일같이 우리에게 새로운 가르침으로 조명해 주십니다. 20대에 읽은 말씀과 중년과 노년에 읽는 말씀의 같은 말씀이라도 그 메시지가 다릅니다. 예수님은 변하는 인간, 변하는 세상에 우리가 알아야 하는 메시지를 주십니다. 예수님의 메시지는 우리 가운데 항상 있습니다. 다만 변화하기 싫은 우리가 그것을 읽지 않고 듣지 않을 뿐니다. 이전에 믿었던 것으로 결론 내어 버리고 이전의 것만 지키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변해가는 세상과 교회의 관계에 대해서 관심이 없습니다. 이런 자폐적 종교는 세상이 어떻게 변해가든지 교회가 어떤 위기에 처해 있든지 여전히 “성수가 오염되었다” 아니다. “파리가 성화되었다”로 나뉘어져 싸울 것입니다. 논쟁의 실력이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논의할 문제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이 문제입니다. 신학박사가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무엇이 신학적 과제인지를 모르는 것이 문제입니다. 말은 잘하는데 문제를 읽어내는 분별과 통찰이 없습니다. 신앙과 신념은 다릅니다. 신앙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것이지만 신념은 내 생각과 내 입장에 근거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자기 신념을 위해 목숨을 건다는 말은 일견 훌륭해 보이지만 모든 경우에 훌륭한 것은 아닙니다. 그 신념이 옳은 것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자기 고집 때문에 죽으면 결국 그 죽음은 어리석고 헛된 것 아닙니까? 자기 신념을 위해 목숨을 걸만한 사람이라면 자기 신념 때문에 남의 목숨을 뺏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리는 말씀이고 구원으로 인도하는 말씀입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입니다. 어제의 메시지에 만족하지 않고 오늘 말씀하시는 메시지를 듣고 분별하여 살면 우리는 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교만하지 않고 말씀을 청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읽고 분별하십시오. 그 말씀이 우리의 인생을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또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없는 종교는 색깔과 무늬에 대해서 논쟁하고 크기를 추구하다가 시대가 지나가면 사라질 것입니다. 그럴 것이면 커져서 망하는 것보다는 작은 것으로 남아 있는 것이 행복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예배와 공동체의 교제를 사랑하시는 에다가와 사랑의 교회 여러분! 우리는 작지만 예배를 사모하고 교제를 기뻐하는 그런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지금 우리 교회는 커져야 하는 때에 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 교회는 변화와 확장을 요구받고 있는 때에 와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보다 커지기 전에 우리가 먼저 변화하지 않는다면 그 커진다는 것은 거절해야 할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이 우리를 약하게 할 것이니까요. 그 변화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한 사람에게라도 더 복음의 소식과 예배의 기쁨을 제공하기를 소원하는 마음입니다. 커질수록 작을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랑을 가진 형제자매들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넓혀갑시다.

 

바울은 영문 안으로 들어갔고 변화를 모르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여전히 서로 싸우고 있습니다. 그들은 진실과 진리와 사랑에서 생각하지 않습니다. 신념과 전통이 서로 틀리면 싸웁니다. 이 전통적 신념에 넘쳐 싸우고 있는 절망적인 사람들의 아우성이 아직 귀에 들릴 것 같은 때에 누가가 11절에 편집한 내용은 이렇습니다. -23:11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협력한 종교세력의 광기의 외침이 여전히 들립니다. 그것을 뒤로하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정치세력 로마를 향해서 바울을 보내려고 하십니다. 놀랄만한 비전입니다. 로마는 그 당시 반 기독교 세력의 중심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아 못 박아 죽인 정치 세력의 심장부였습니다. 예수를 죽인 종교세력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유대교였지요. 황제 네로에 의해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혹독한 박해가 자행되던 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울을 통해 로마를 마음에 품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바울을 부르실 때부터 마음에 지니고 계셨던 궁극적인 관심과 뜻은 바울을 통해서 로마에까지 십자가의 복음과 구원의 복음을 전하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복음은 로마까지 확장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로마까지 확장이 아니라 로마의 길을 통해 세상에 복음을 확장할 계획을 가지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도 진행형입니다.

 

로마선교는 더 많은 용기와 사랑이 필요합니다. 지식과 지혜도 더 많이 필요합니다. 복음이 건너간 로마는 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발전하였고 기어이 기독교의 심장이 되었습니다. 이후 로마는 기독교와 더해져서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현대 문명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2019년에는 변화와 확장의 용기를 가진 에다가와 사랑의 교회가 우리 안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을 변화시키고 우리의 두려운 로마에까지 선교하게 되기를 선교의 주인이신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9년 1월 13일 에다가와 사랑의 교회 주일예배 설교 사도행전 강해 조용길 전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