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ペテロの否認、The Denial of Saint Peter」、カラバジョは告発する女性とかぶとを被った軍人の前に立っているかわいそうな姿のペテロを描いた。軍人の裾一部と女性の片側の顔をくぐって出てきた光が、ペテロの悲惨な顔を照らしている。光が照らすその向こうには、イエスさまが兵士たちに頬を打たれていたものであろう。詳しく見てみると、ペテロの目元に涙が溜まっていて口は塞がらないまま開いている。

ペテロは、イエスさまを否認した。イエスの一派と思われ、捕えられるのを恐れていたからである。それと同時にペテロはもう一つの恐れが重くのしかかっている。自分が生きるために、イエスさまを否認しなければならない悲しみであった。価値がないから裏切ったわけではない。裏切りたくなかったが、弱い肉身が裏切りに勝てなかった悲しみであった。聖書は、ペテロが臆病であったということを告発し、それを非難しようというものではない。私たちがどれだけ弱い存在なのか、思い起こしているのである。イエスは自信に満ちていたペテロに預言した。「今夜、鶏が鳴く前に、あなたは三度、わたしを知らないと言います。」そのためか、カラバジョの絵ではペテロの三本の指は自分の肺を奥深く刺している。

イエスさまの預言にもかかわらず、ペテロは、自分の信仰の熱心によって裏切らないで済むことはできただろうか?そうではない。ペテロにおいてまだ福音の整理は不完全である。いや、今こそ福音の教育が始ったいるのである。イエスさまはもはや弟子たちを集めて講義することはないが、福音の授業はこれから始まる。ペテロは信仰があったがゆえにさ迷い、献身したがゆえに漂流した。しかし、そのさ迷いと漂流が辿り着いたのは、イエス・キリストが十字架と復活をもって完成された福音である。自信満々であったペテロは、この痛みの時間を通して、神の愛はどんなに大きなものであり、人間はどんなに悲惨な存在なのかに気付く。

信仰の豪気では、肉体に打ち勝つことはできない。福音の力は、人間の熱心ではなく、十字架と復活の完成から始まる。使徒の宣教は、義理ではなく、聖霊が臨まなければ始まらない。自信満々のペテロは、「今夜、鶏が鳴く前に、あなたは三度、わたしを知らないと言います。」という言葉を流して聞いたが、謙虚になったペテロは、「聖霊があなたがたの上に臨まれるとき、あなたがたは力を受けます。そして、エルサレム、ユダヤとサマリヤの全土、および地の果てにまで、わたしの証人となります。」と言われたことを心に刻んだ。ペテロが福音の献身の上に立ったのは、キリストの送られた聖霊が臨まれてからである。

放蕩して暴力的であったローマの天才画家、カラバジョは殺人を犯した後、逃亡者となった教皇に、絵と手紙を送って赦免を求めるのであるが、 「ペテロの否認」はカラバジョが死んだ年、つまり逃げまわるうちに描いた最後の作品である。初代教皇ペテロも罪を犯したということを教皇に訴えているのだろうか?それとも、福音を知る前の悲惨な自分の姿を描いたのだろうか?聖霊が十字架と復活の福音を悟らせない限り、カラバジョの絵で泣いているペテロの姿はまさに私たちの肖像画ではないだろうか。

 

「베드로의 부인、The Denial of Saint Peter」, 카라바조는 고발하는 여인과 투구를 입은 군인 앞에서 한없이 약해져 있는 가여운 모습의 베드로를 그렸다. 군병의 옷자락 일부와 여인의 한쪽 얼굴을 뚫고 나온 빛이 베드로의 비참한 얼굴을 비추고 있다. 빛이 비치는 그 건너편에는 예수님이 군병들에게 뺨을 맞고 있었을 것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베드로 눈가에는 눈물이 고여 있고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열려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했다. 예수의 일당으로 잡혀갈까 봐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살기 위해 예수님을 부정해야 하는 슬픔이었다. 가치가 없어서 배신한 것은 아니다. 배신하고 싶지 않았지만 연약한 육체가 배신을 이겨내지 못하는 슬픔이었다. 성경은 베드로가 두려워하고 비겁했던 것을 우리에게 고발하고 그것을 비난하자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얼마나 연약하고 비겁한지를 상기시키고 있다. 예수님은 자신만만하던 베드로에게 예언했다.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그래서인지 카라바조 그림에서 베드로의 세 개의 손가락은 자신의 폐부를 깊숙이 찌르고 있다.

예수님의 예언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자신의 믿음의 열심으로 이 배신의 위기를 이겨 낼 수 있었을까? 그렇지 않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아직 복음의 정리는 불완전하다. 아니 이제야 비로소 복음에 대한 교육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더 이상 제자들을 모아놓고 강의하지 않으나 복음의 수업은 이제부터 시작된다. 베드로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방황을 했고 헌신했기 때문에 삶이 표류했다. 그러나 그 방황과 표류가 정착한 곳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완성된 복음이었다. 자신만만하던 베드로는 이 고통의 시간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이고 인간은 얼마나 비참한 존재인지를 다시 깨달았다.

믿음의 호기로는 육체를 이길 수 없다. 복음의 능력은 인간의 열심이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이 완성되어야 시작된다. 사도의 선교는 의리가 아니라 성령이 임해야만 시작된다. 베드로는 닭울기 전에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하신 말씀을 흘려들었지만 겸손해진 베드로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신 말씀을 새겨 들었다. 베드로가 복음의 헌신 위에 선 것은 그리스도의 보내신 영, 성령이 임하면서부터이다.

방탕하고 폭력적이었던 로마의 천재 화가 카라바조는 살인을 저지른 후 도망자의 신세가 되어 교황에게 그림과 편지를 보내어 사면을 부탁했다. 「베드로의 부인」은 카라바조가 죽던 해에 도망지에서 그린 마지막 작품이다. 초대 교황인 베드로도 죄를 지었다는 것을 교황에게 호소한 것일까 아니면 복음을 알기 전의 비참했던 자신의 모습을 참회하며 그린 것일까? 성령이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깨닫게 하지 않는 한 카라바조의 그림에서 울고 있는 베드로는 여전히 우리들의 초상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