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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의 슬픔
마태복음 26:67-75

지난주에 겟세마네에서 기도하던 예수님에 대해서 설교했습니다. 십자가의 길이 얼마나 두렵고 고통스러운 길이었는지, 오늘은 또 한 명의 인물 베드로를 통해서 십자가의 길을 다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감람산의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던 중에 체포되었고 예루살렘 성문을 통과해서 가야바 대제사장의 관저로 들어갔습니다. 그 길에서 제자들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불과 몇 분전에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기도할 때 제자들은 잠들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깨워서 중보기도를 부탁했지만 잠을 이기지 못하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체포되는 것을 보고는 일어나 전력질주로 도망을 갔습니다. 마가복음에는 좀 더 생생한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4:50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14:51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오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14:52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 급박했던 상황을 알 것 같습니다. 마가복음에서 홑이불을 벗고 알몸으로 도망간 제자는 그 글을 쓴 마가 자신입니다. 자신이 경험한 충격과 두려움, 그리고 회한을 스스로 복음서에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사실 제자들은 다 도망갔어도 베드로는 먼 발치에서나마 들키지 않고 예수님을 뒤따라 갔습니다. 병사들은 대제사장 관저 마당에 두 손이 묶여 있는 예수의 얼굴에 침을 뱉었습니다. 또 예수의 얼굴을 가리고 주먹으로 때렸습니다. 그리고는 누가 때렸는지 맞혀 보라고 조롱하고 있었습니다. 마가복음에는 병사들 뿐 아니라 제사장 집의 종들도 예수님의 뺨을 손으로 때렸습니다. 예수님은 군병들과 하인들의 장난감이 되어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모른 척 한 구석에서 그 충격적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 때 제사장 가야바의 하녀가 불을 쬐고 있던 베드로에게 말했습니다. -26:69 …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베드로는 자신의 정체가 들킨 것 같아 깜짝 놀랬습니다. 베드로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26:70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26:71 앞문까지 나아가니…-베드로는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고 부인하고 그 자리를 피해 도망갑니다. 도망 나가는 길에서 또 다른 하인이 베드로를 알아봅니다.-26:71 …다른 비자가 저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궁지에 몰린 베드로의 목소리가 커집니다. -26:72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 하노라 하더라-이 소란으로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베드로를 주목하게 있었고 구타당하고 있던 예수님도 베드로를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베드로의 마음이 급박하여 큰소리로 예수님을 부인했고 베드로의 목소리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베드로를 알아본 것입니다. -26:73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베드로를 예수의 일당이라고 몰아갑니다. 베드로는 다시 황급히 말합니다.-26:74 저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닭이 곧 울더라-

순식간에 일어난 일입니다. 베드로는 그렇게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몇 시간 전에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한 말을 기억하십니까?-마26:33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그러나 베드로의 자신감은 그날 밤을 넘기지 못했습니다.오히려 같은 날에 저주를 걸고 예수님을 모른다고 맹세했습니다. 주를 따르겠다던 맹세는 불과 몇 시간 만에 주를 배신하는 맹세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싫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서 그랬습니다 생존은 얼마나 무섭습니까? 생존하려고 예수님을 모른다고 해야만 했습니다. 저주와 맹세로 세 번의 부인과 끝날 때, 닭이 웁니다.

그때 비로소 예수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26:75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그리고 예수님과 눈이 마주칩니다. 교회의 반석이 되고 천국의 열쇠를 쥔다던 신앙고백의 베드로는 이렇게 어이없이 무너집니다. 아직 어제 했던 신앙고백과 오늘 저녁까지 했던 맹세들이 입안에 남아있는데 몸은 전혀 다른 것을 말해버렸습니다. 베드로는 자신과 자신의 의지가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정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베드로는 자신의 자신감이라는 것도 부정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희망의 단어를 하나만 찾아낸다면 그것은 ‘통곡’입니다. 베드로는 밖으로 나가 울었습니다. 심히 통곡했다고 했습니다. 만약 이것이 예수님에 대한 미안함과 양심의 가책이라면 울되 통곡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저 적은 눈물을 훔치며 사라졌겠지요. 베드로의 통곡의 이유는 예수님을 부인하고 그 예수님과 눈이 마주치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나면서 그 순간에 예수님의 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날 밤 성찬을 주시면서 이것이 나의 피고 살이라고 하시며 나를 기념하라고 했던 말씀과 겟세마네에서 모두 잠들어 있을 때 땀이 피가 되듯이 외롭고 고통스럽게 기도를 하시던 것이 기억났습니다. 그리고 자신만만하게 예수님을 다르겠다고 장담할 때 세 번 부인하고 도망갈 것이라고 했던 예수님이 예언이 생각났습니다. 닭이 울자 베드로도 울었습니다.

예수님이 맞으며 조롱당하며 수난을 당하고 있을 시간에 베드로는 밖에서 울었습니다. 우리 안에는 항상 그런 베드로의 슬픔이 있습니다. 생존하기 위해서 매일같이 십자가를 외면하고 생존하기 위해서 맹세하고 서약하고 약속했던 것을 지키지 못하고 그러나 양심과 믿음이 없는 것도 아니고 예수의 사랑을 기억하기 때문에 밖에 서서 울고만 있는 베드로의 슬픔이라는 것은 우리 안에도 있습니다. 진정한 생존은 예수 안에 사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이 통곡은 실패로 끝나지 않습니다. 대전환을 예고하는 복선입니다. 이 눈물이 앞으로 베드로를 어떻게 살게 할 것인지를 결정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 승천, 그리고 성령강림 후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믿음직한 사도가 되어 교회를 세우고 예수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다가 네로의 박해가 심해지자 교회는 중요한 리더인 베드로를 죽음의 위험에서 피신시켜 로마 밖으로 탈출시켰습니다. 로마를 떠나 안전한 곳으로 향해가던 베드로는 맞은 편에서 십자가를 지고 걸어오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나서 기뻤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릅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그러자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네가 나의 백성을 버리고 로마를 떠나려 하는 고로 내가 너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고 로마로 향하느니라”

성경 어디에 그런 내용에 있는가 물으실텐데 영화 「쿼바디스」의 이야기입니다. 베드로는 “쿼 바디스 도미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라고 물었습니다. 우리 성경에는 없지만 외경인 베드로행전과 가톨릭 전승에 전해지는 이야기로 소설이 만들어지고 영화가 만들어졌습니다. 결국 베드로는 로마로 돌아갔고 로마에서 순교합니다. 베드로는 사도바울과 거의 비슷한 시점에 순교합니다. 베드로는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와 똑같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을 수 없다고 해서 자처해서 거꾸로 십자가형을 받았다고 한다. 상상하기 힘든 고통입니다. 온 몸의 피가 얼굴로 흘러 나가야 죽게 됩니다. 여종과 군병을 피해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하고 도망친 베드로는 네로의 공포에 지지않고 믿음과 고백과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지켜냈습니다.

외경과 쿼바디스에만 있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요한복음에는 닭 울기 전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다는 예언을 하시면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지금은 네가 나를 따라 올 수 없다고 하지만 나중에는 따라온다” 고 하셨습니다. 그 예언대로 되었습니다.-요13:36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 요13:37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요13:3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그런데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는 그 말씀을 하시기 전에 당부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지금 따라올 수 없고 나중에 따라올텐데 그 때까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으라고 당부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요13:34 …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13: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놀랍지 않습니까? 예수님께 직접 배운 훈련으로도 예수님을 배신했지만 형제를 사랑하는 훈련으로 베드로의 신앙은 최고의 것에 이르렀습니다. 신앙은 사랑의 힘입니다.

오늘 주보의 칼럼에 「베드로의 부인」이라는 제목의 카라바조의 그림을 실었습니다. 그 그림에서 베드로는 두려움과 죄책감으로 고통스럽게 울고 있지만 카라바조는「베드로의 순교」The Crucifixion of Saint Peter 라는 작품도 남겼는데 그 그림에서 정작 베드로는 울지 않습니다. 쿼바디스에 말하고 있듯이 로마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 형제들을 위해서 다시 로마로 들어갔습니다. 그것이 곧 믿음이었습니다. 예수 사랑은 곧 형제 사랑이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곧 예수를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슬픔은 저에게도 있는 것 같습니다. 저의 기억 하나 소개하고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저는 2주전 교단총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교역자가 되어 복음을 위해 일하겠다는 의미에서 헌신을 한 지 꼭 14년이 되는 해에 안수를 받았습니다. 만 13년이 걸렸습니다. 2005년에 헌신자 과정에 입학해서 2년을 공부했습니다. 같이 시작한 사람들 중에 빠른 사람은 몇 년이 지난 후에 목사가 된 것 같습니다. 저의 경우에는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하기 싫어서 도망가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일부러 늦추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길이 열리지 않아 방황했습니다. 그 방황과 표류가 시작된 시간은 역설적이게도 저에게 가장 자신감이 많았을 때였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이 많고 성공할 수 있는 자신감으로 충만했을 때였습니다. 무엇이든 하면 될 것 같았습니다. 빠르게 달려가다다 그 자신감의 정점에서 넘어졌습니다. 그리고 짧지 않은 시간을 방황했습니다. 저는 깨닫지 못했지만 그 자신감의 정점이라는 것은 곧 교만이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슬픔 같은 시간을 보내야했습니다. 저는 신앙과 헌신의 주소를 찾지 못해서 낙심하고 절망해 있던 우울증을 앓았습니다. 2년 동안 완벽하게 무능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신학교에 들어가서 4년을 더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에다가와에 와서 4년을 더 지내고 이제 목사가 되었습니다. 전도사가 되고 목사가 되는 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목사 안수가 늦어져서 실망한 적도 없습니다. 오히려 더 무서워졌습니다. 그리고 자신감이라는 것은 더 무섭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사건은 베드로에게 없어서는 안될 시간이고 사건이었습니다. 그것은 곧 새로운 믿음의 새벽이 밝아온다는 말이고 자신의 자신감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선언 같은 것이었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은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의 은혜는 저에게도 이어진 것 같습니다. 자신만만했던 베드로에게 통곡의 밤이 있었듯이 근거없이 교만해진 저에게도 슬픔의 시간은 필요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무너진 그 통곡의 자리에서 기어이 나를 부정할 수 있고 예수님과 눈이 마주친 그 자리에서 비로소 고난받는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복음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