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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17:24~27

 

출애굽 때 시내산에서 인구조사를 한 후에 모든 유대인 성인 남자는 생명의 속전, 즉 애굽에서 건져주신 생명의 대가로 반 세겔씩을 여호와께 드리게 되었다. 그것은 예수님의 시대에까지 변함없이 이어졌는데 유대 사회는 유월절이 시작되기 한 달 전에 반 세겔의 성전세를 걷었다. 마태복음 17장은 꼭 그 때를 지나고 있다. 세금걷는 사람들이 예수님 일행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너의 선생 예수는 이 성전세를 낸 다고 하더냐 안 낸다고 하더냐.” 베드로는 분위기로 보아 예수님도 이 성전세를 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물어보지 않고 임의로 “가로되 내신다” 고 대답하고 예수님을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 베드로는 이제 예수님을 설득해야 했다. 그러나 베드로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먼저 물으셨다.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 관세와 정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 받느냐, 타인에게 받느냐.” 즉 왕이 세금을 걷을 때 왕자들에게 걷는가 아니면 백성들에게 걷는가라고 물으신 것이다. “베드로가 가로되 타인에게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하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 베드로의 대답처럼 당연히 왕자에게는 세금이 면제되고 백성들에게 납세의 의무가 주어질 것이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질문하고 싶으셨던 것은 “왕자는 왕이 부과하는 세금에서 면제되니 하나님의 아들인 나도 하나님의 전 성전세가 면제되는 것이 옳지 않으냐”라는 말씀이다. 베드로는 입장이 난처해졌다. 불과 얼마 전까지 예수님에 대해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고 스스로 고백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오랜만에 고기를 잡으라고 하셨다. 첫 물고기를 잡아 그 입을 벌려보면 한 세겔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 베드로가 말씀을 따라 나가 고기를 잡고 보니 과연 그 입 안에 한 세겔 동전이 있었다. 베드로는 놀랐을 것이다. 그 물고기 입에서 동전이 발견되었을 때, 그것을 꺼내들었을 때 베드로의 기분이 어떠했을까? 틀림없이 이렇게 중얼거렸을 것이다. “아! 진정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맞습니다.” 빌립보 가이사랴에서 고백했던 그 신앙, “예수스 크리스토스 데우 휘오스 소테르! (Ιησους Χριστος Θεου Υιος Σωτηρ)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 고백을 다시 해야 했을 것이다. 이것의 이니셜을 따서 이어서 읽으면 이크투스 (ΙΧΘΥΣ)가 된다. 그리고 이크투스라는 말은 물고기라는 말이다. 물고기를 잡다가 예수님을 만난 베드로에게 물고기를 통해서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고 기억나게 하는 것은 예수님의 특별한 배려이다. 베드로가 이크투스(ΙΧΘΥΣ) 를 본 순간 이크투스 (Ιησους Χριστος Θεου Υιος Σωτηρ) 를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성전세를 내지 않아도 되는 하나님의 아들임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런데 그것을 확인시켜주신 예수님은 다른 말씀을 하신다.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 성인남자 한 명이 반 세겔을 내야하니 예수님 몫과 베드로 몫으로 그 한 세겔을 납부하라고 하셨다. 한 세겔 동전이 물고기 입 안에 있음을 알고 계셨으니 그것은 하나님의 전지하심이고, 그 동전과 물고기를 존재하게 하시고 베드로가 처음 낚는 것에 그것이 걸리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전능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전지전능으로 일어난 물고기의 입안의 동전 사건은 세금을 내기 위한 기적이었다. 세금을 면제받을 수 있는 기적이 아니라 세금을 낼 수 있게 한 기적이었다. 예수님은 그 성전세를 연체없이 지불하셨다. 이것을 말씀하시면서 “우리가 저희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하여” 라고 했다. 예수는 세금 안 내는 사람이라고 오해받는 것이 무서웠던 것이 아니고 그 오해로 인해 사람들이 실망하고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종교단체는 영리를 추구하지 않기 때문에 종교활동이 면세와 비과세의 대상이 될 수는 있다. 하지만 목회자 개인이 받은 보수에 대해서는 소득 기준에 따라 세금을 내는 것이 옳다. 목회자도 한 명의 사회인이며 시민이고 그들도 국가와 사회에 구축된 인프라와 시스템을 사용하므로 세금을 내는 것이 마땅하다. 예수님은 결코 이것에 대해서 이견이 없으실 것이다. 이익을 믿는 사람은 과세를 반대하겠지만 예수를 믿는 사람은 반대할 근거가 없다. 예수님은 스스로 사회적 의무를 면제하지 않으셨다. 마치 겟세마네의 기도처럼, 십자가의 순종처럼 해야할 의무와 책임 그 사명을 면제하지 않았다. 배와 그물과 모든 것을 버리고 쫒았던 헌신이 다시 특권의식과 기득권으로 둔갑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의무를 다할 수 있는 힘을 공급해 주셨다. 우리는 세금을 내지 않도록 기도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세금을 내고 사회에 공헌하기 위해 그 필요가 공급되는 것을 위해서 기도해야하는 것일까. 예수님은 베드로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로 그 한 세겔을 공급하셨고 그것으로 의무를 다하게 하셨다. 베드로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일, 물고기 낚을 때는 물고기의 값으로 하면 되었을 것이고, 사람을 낚을 때는 말씀을 전하고 받은 사례로 정해진 기준 안에서 주어진 의무와 책임을 다하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성직이다.

 

2019년 4월 24일 수요얘베 설교 재구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