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다녀왔다. 한국의 공기는 분노였다. 역사관과 정치관이 무섭게 대립하고 갈등하고 있었다. 감정은 격양되어 있었지만, 양상은 단순했다. 오직 두 가지 관점 이른바 보수와 진보, 좌파와 우파로 대립해 있었다. 다양한 정치적 과제가 있지만, 견해는 오직 두 개로 헤쳐 모여져 있는 것이다. 그것이 이상했다. 사람들이 사회와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왜 더 다양하지 않은 것일까. 사회적 변수는 다양한데 왜 견해는 다양하지 않고 오직 두 개 뿐인 것일까. 예컨대 경제정책에는 반대하지만 외교 정잭에는 찬성할 수도 있지 않을까. 또는 역사 인식은 다르지만 최저임금에 대한 견해는 같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오직 두 개로 대립한 적이 존재할 뿐이었다. 견해가 같은 사람이 모인 것이 아니라 모인 사람들이 견해를 같이하고 있었다. 어느 대형 교회 벽에는 “용서는 최대의 복수입니다”는 현수막이 나붙어 있었다. 용서하라는 것인지 복수하라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현수막은 한국 사회가 갈등하고 분노하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용서라는 말로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기만당한 백성들에게 진실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는 각각의 정의와 사명감에 불타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의 것이 진실이며 정의라는 신념에 차 있을 때는 물러설 수가 없는 것이다. 무서운 것은 정의와 불의의 대립이 아니라 각각의 신념의 대립이다. 내가 외국에 살고 있어서 그런 것일까. 나를 만난 모든 사람들은 나를 붙잡고 그 하소연을 쏟아냈다. 나라가 망하게 생겼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들의 말을 들으면서 공통점을 발견했다. 각각 제시하는 근거가 인용이라는 사실이다. 아무도 1차자료를 찾아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이미 존재하는 상반된 견해를 파악한 후에 그것을 비교하고 분석해서 무엇이 더 타당한지 자신 스스로 결론을 내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자신이 신뢰하는 유튜브 채널, 카톡이 실어나르는 뉴스가 특정한 관점에서 해설한 것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인용의 언어는 이미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처음부터 적대감을 심기 위해서 기획된 정보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은 누군가의 의도된 정치적 목적에 의해 설득되었고 그것에 동의한 것이다. 그래서 한국 사회는 오직 둘로 나뉘어 갈등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신념이라고 부른다. 학습되고 교육되었다면 그것은 이미 신념일 것이다. 그러나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인된 것이 아니다. 오직 그것을 믿고 있는 것뿐이다. 오른쪽 얼굴만 본 사람이 왼쪽 얼굴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에 대해서 죽여야 한다고 흥분하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 교회도 사과 자르듯이 나뉘어있다. 동성애 문제를 설교한 한 대형교회가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그 설교의 요지를 찾아보았는데 나의 견해로는 잘 정리된 설교는 아닌 것 같았지만 틀린 말을 하는 설교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설교자는 동성애를 지지하거나 허용하자는 것이 아니었다. 동성애가 기독교윤리 차원에서 문제라면 현재의 기독교의 성 윤리는 건전한가라는 자기성찰적 반문이었다. 그러나 마치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듯한 비난 여론은 좌파 목사를 끌어내리라는 구호로 이어지고 있다. 설교자는 자신의 믿음과 지식과 경험을 양심에 투영해서 말해야 하는 책임과 권한이 있다. 청중의 신념에 동의할 수 있는 말만 하는 것이 설교가 아니다. 이 논란은 신학적 정당성을 논하는 것이 아니고 정치적 매도라고 밖에 보이지 않았다.

신념은 종종 진실의 무서운 적이 된다. C.S.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에서 믿음을 두 가지로 구분해서 말했다. 첫째는 신념(Belief)이다. 신념을 신앙의 차원에서 사용하기도 한다. 신념은 분명 신앙과 교집합을 가지겠지만 신앙과 동의어일 수는 없다. 어떤 사실과 해석에 대해서 동의하면 그것은 곧 신념이 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역사적 사건으로 인정하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루이스가 말하는 믿음의 두 번째 의미는 그런 사실을 인정하는 신념의 차원이 아니라 자신에게 완전히 절망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상태로 변화된 믿음이다. 이것이 믿음이라면 신념으로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신념을 깨부숴야만 이 신앙이라는 것이 시작된다. 인간은 도덕적인 노력을 진지하게 기울여 봐야만 자신이 절망적인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에게 항복할 수 있다. 율법의 목적이 그것이었다. 루이스는 진지하게 6개월간 도덕적 노력을 기울인다면 인간은 반드시 자신에게 절망하고 하나님을 인정할 것이라고 단언한다. 다만 사람들은 6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자신을 합리화하면서 본질을 흐려놓기 때문에 자신과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한다. 그 노력에 성공하여 자신의 절망을 인정한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그 절망에서 구원받을 수 있다. 왜냐하면 선의 원천은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분별의 원천은 성령이기 때문이다. 신념이 아닌 신앙에서 분별과 선이 나온다는 것이다. 겸손하지 않은 상태, 분노에 휩싸인 흥분된 신념을 믿음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신념의 사람들은 입에 독을 물고 손에 칼을 쥐고 있다. 그렇게 확고한 신념에 찬 사람들은 많다. 과연 이 갈등과 분노 속에서 아우성치고 있는 것은 선동된 정치적 신념일까 그리스도를 따르는 믿음일까. 하나님의 아들들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복 있다는 사람들, 화평케 하는 복 있는 사람들, 그들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