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6.16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창세기12:1~4)

설교자: 강대경 신학생

1. 올해 들어 저는 창세기를 설교하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 가인과 아벨, 지난 번은 노아의 믿음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의 인물은 믿음을 갖는 모든 자들의 아버지인 아브라함입니다.

오늘 우리가 아브라함의 믿음을 생각할 때 그가 나그네였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그네는 어떤 사정으로 인해 자기 나라를 떠나 일시적으로 외국에 머무는 사람, 거기서 붙어 사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한 마디로 외국인 체류자입니다.

일본어성경은 기류자(寄留者)로 번역했고 히브리어로 “게르”라는 말입니다.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그들은 땅을 소유할 수 없어서 가난한 사회적 약자였습니다. 할례를 받으면 이스라엘 공동체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할례는 오늘날의 영주권과 비슷한 게 아니었나 생각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붙어사는 그들은 음식도 잠자는 곳도 공급받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었으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런 나그네들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라는 율법을 만드셨습니다. 이 나그네는 어디서부터 시작되는가, 성경에 등장하는 첫 나그네, 그게 바로 아브라함인 것입니다.

3. 베드로전서2장1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우리는 아브라함과 같이 모두가 나그네이며 행인입니다. 광야와 같은 이 삶을 살아가는 나그네입니다. 이 땅에서 잠시 살다가 떠나는 하늘의 시민권자들입니다. 우리 교회는 재일교포도 계시고 주재원도 계시고 한국에서 오신 분들도 계십니다. 물론 일본 분들도 계십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 모두가 나그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4. 먼저 오늘 본문 말씀을 보겠습니다. 1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2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세였더라.

5. 이 구절은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으로부터 여러 민족이 생기고 여러 나라가 일어났습니다.

아브라함은 셈의 자손입니다. 수많은 인류 중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꿈을 한 사람을 통하여 이루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창세기 12장, 오늘 분문은 하나님의 그 꿈과 인류를 향하신 새로운 계획의 시작을 알리는 구절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꿈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일본어성경은 “너는 축복이 될지라”로 번역함.) 하나님의 역사, 바로 HIS STORY (=History)의 목족이 축복에 있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통하여 모든 사람을 축복하기 위한 꿈이었습니다. 우리 인간에게 축복은 집이 있다는 것입니다. 집과 땅과 가족, 그 모든 것이 축복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축복을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네가 생각하는 그 축복들을 버리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주시는 집과 땅과 가족이 진짜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그 축복을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나그네에겐 집이 없습니다. 땅도 가족도 없습니다. 나그네는 새로운 고향과 새로운 땅을 사모합니다. 하나님은 지금 있는 축복 대신 새로운 고향인 약속의 땅을 진짜 축복으로 주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큰 축복은 하늘에 있는 우리의 본향 (고향)이기 때문입니다.

6. 이 축복의 말씀을 들은 아브라함은 4절에 있는 것처럼 여호와의 말씀 좇아 말씀하신대로 그곳을 떠났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75세였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아브라함을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지시할 땅이 어딘지도 모른 채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이때 이미 하나님을 믿고 있었던 것입니까. 여호수와24장2~3절을 보겠습니다.

2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옛적에 너희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비, 나홀의 아비 데라가 강 저편에 거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3내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편에서 이끌어내어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온 땅을 두루 행하게 하고 그 씨를 번성케 하려고 그에게 이삭을 주었고

하나님은 분명히 아브라함의 아비 데라가 다른 신들을 섬기고 있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의 종교가 곧 그 가정의 종교가 되는 당시의 배경을 고려하면 아브라함도 다른 신들을 믿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존재를 알았습니다. 그리고서 강을 건너게 된 것입니다. 그때 강을 건너는 것은 자신들이 사는 세계와는 다른 세계, 종교가 다른 세계에 들어감을 의미했습니다. 하나님을 안 아브라함은 신세계에 발을 내딛는 결정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신세계에 인도하셨고 축복의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를 선택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에서 출발된 것입니다.

7. 이와 같이 우상의 땅으로부터 하나님께 구원받은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꿈을 하나님과 함께 이루어 나갑니다. 나그네인 아브라함과 함께 하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는 믿음의 조상, 믿음의 아버지로 불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은 아버지의 날입니다. 아버지의 날인 오늘, 우리 믿음의 조상, 믿음의 아버지인 아브라함한테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인가, 하늘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나그네와 같은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고 계시는가. 오늘은 크게 3가지로 나눠서 함께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①첫 번째로,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12장10절 이후에 부르심을 받은 아브라함이 기근을 피하기 위해 애굽으로 내려갔다는 기록이 있는데 거기서 아내 사라가 자신의 아내가 아니라 여동생이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 이유는 아름다운 그녀를 보고 애굽의 왕이 자신을 죽이고 사라를 왕의 아내로 삼는 일을 두려워 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20장을 보면 그랄 땅에 거류했을 때도 그랄 왕이었던 아비멜렉에게도 같은 거짓말을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결코 징계하지도 혼내지도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애굽 왕 바로로부터 많은 재산은 얻게 되었고 아비멜렉에게는 좋은 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건 무슨 까닭입니까.

그 답을 찾기 위해15장을 보겠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한 가지 사실은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라는 것입니다.

15장9절에서 21절에 등장하는 계약은 동물의 시체를 반으로 쪼개고 계약을 맺는 당사자가 그 사이를 통과한다는 의식인데, 이건 당시 사람들이 흔히 행했던 계약의 의식과 같은 방법입니다.

15:9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지니라

15:10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중요한 것은 계약의 당사자인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함께 통과해야 하는데 하나님만 통과했다는 점입니다.

15:17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이 말씀이 의미라는 바는 무엇입니까. 하나님 자신이 혼자서, 일방적으로,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책임을 지신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스라엘, 다시말해 하나님의 백성을 축복한다는 계약은 하나님의 일방적은 은혜이며 아브라함에게는 아무 조건이 없는 무조건적인 약속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아브라함처럼 우리도 실수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방적은 은혜, 무조건적인 은혜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다만 그 약속을 받기 위해서는 한 가지 조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믿음입니다.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을 믿는 그 믿음말입니다.

그 다음 일은 하나님이 성취하신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입니다. 계약 의식 직전인15장6절에서, 아직 아들이 없었던 아브라함은 셀 수 없는 뭇별과 같이 자손을 주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의로 여겨졌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여겨진 아브라함에게 계약 의식을 통하여 계약의 책임은 자신에게 있음을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고 따르는 우리의 구원도 그 책임을 끝까지 져주시는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은 현상 유지만 하면 되는 것입니까. 지금의 믿음으로 살아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을 통해 아브라함의 믿음이 갈수록 발전하여 성장하였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②두 번째로, “발전하고 성장하는 믿음”에 대해서입니다.

아브라함은 75세 때 고향을 떠나 175세까지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그는 평생동안 믿음이 멈추지 아니하고 발전해 나갔습니다. 그것을 로마서4장19절에서 22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19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2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물론 아브라함은 말씀드렸다시피 실수를 범한 때도 있었고 자식을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음에도 여종이었던 애굽 사람 하갈로 하여금 이스마엘을 낳게 한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필요한 때에 항상 찾아와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약해지려고 할 때, 약속의 말씀의 의심을 품으려고 할 때, 하나님은 약속의 말씀을 반복해서 아브라함에게 각인시키셨습니다.

그의 믿음을 성장시킨 이는 아브라함이 아닌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은 우리에게도 큰 위로가 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없이 살 수 없는 나그네, 그것이 바로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아브라함과 함께 하셨습니다.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는 일과 동시에 그와 관계를 맺기 원하셨습니다.

창세기17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주시면서 열국의 아버지가 되어 가나안 땅 (약속의 땅)을 그 자손에게 주시겠다는 계약을 맺습니다. 다만 이에 앞서 1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아브람의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여기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완전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완전하다’는 히브리어는 ‘흠 없는 상태’를 말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15장6절에서 이미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여겨진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왜 여기에 와서 완전한 자가 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이 ‘완전하다’라는 말을 찾아보면 압도적으로 레위기에 많이 등장합니다. 게다가 거의 대부분이 번제 혹은 제물과 관련하여 사용되고 있습니다.

한 예로 레위기 1장3절을 보겠습니다. “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회막문에서 여호와 앞에 열납하시도록 드릴지니라.” 여기서 ‘흠 없는’ 상태가 하나님이 받아주시는 ‘완전한’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흠 없는’ 이라는 말이 제물이 아닌 사람에게 적용이 된다면, 창세기17장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완전하라”라는 말은 아브라함을 기뻐 받으시기 위하여, 또는 아브라함과 깊은 관계를 맺기 위하여, 그렇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을 가졌다 해도 그 믿음을 그 믿음이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보장은 없습니다. 무슨 일이 생길지 우리는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있을 때 그 믿음은 흔들리지 않는 확신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여겨진 아브라함에게 자신과의 관계를 끊지 않기 위해서 완전한 자가 되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주 안에 머무르라고 말씀하십니다. 포도나무이신 주님과 붙어 있을 때만이 우리의 믿음은 성장하고 성령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믿음의 절정은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창세기22장에 나오는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장면입니다. 오랫동안 기다려서 얻은 소중한 외아들을 번제로 드리려고 했을 때 마침 하나님은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아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신뢰하는 줄은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믿음이 절정에 도달할 때 그의 믿음이 눈에 보이는 형태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의 믿음이 무르익어서 열매가 된 것입니다.

그럼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늘 약속의 말씀을 던져주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약속의 말씀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그 성경의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는 내려놓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이 마지막 포인트입니다.

③세 번째로, “이 세상의 것에 집착하지 않는 믿음”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세상의 것들에 소망을 두지 않고 하나님의 축복에게 소망을 두었습니다. 그가 자신의 고향과 친척과 땅을 버려 나그네의 삶을 살아간 모습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그것뿐만 아닙니다. 애굽에서 나올 때 수많은 재산을 얻게 된 아브라함과 그의 조카 롯은 창세기 13장에서 헤어지게 되는데, 그들의 너무나 많은 재산때문에 그들의 목자가 서로 다투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롯에게 “나를 떠나라 네가 좌로 가하면 나는 우로 가고 네가 우로 가면 나는 좌로 가겠다”면서 롯에게 먼저 마음에 드는 땅으로 가라고 제안합니다.

13장10절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롯은 자기의 눈으로 확인한 좋은 땅으로 떠날 결심을 했습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자기 재산을 지키고 더 풍성해지기를 바랬다면 아브라함이 먼저 선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자신이 가야할 땅을 자기가 선택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렸습니다.

14~15절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롯은 스스로 눈을 들었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까지 눈을 들지 않았습니다. 이를 통해 아브라함이 재산 혹은 이 세상의 것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겼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14장에서는 소돔과 고모라 등의 연합군이 엘람, 고임, 시날, 엘라살의 연합군에게 전쟁에서 패배하게 되어 모든 식물과 재산이 빼앗기게 됩니다. 소돔에 있었던 롯도 결국 모든 것을 빼앗기고 맙니다.

그 소식을 들은 아브라함은 군대를 보내 네 명의 왕이 이끄는 군대와 싸워 결국 승리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롯의 재산도 되돌려 주었습니다. 그러자 소돔의 왕은 아브라함에게 “물품은 네가 취하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14장23절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케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

여러분 아브라함의 이 말을 듣고 소름 끼치지 않습니까. 소돔의 재산을 얻으면 더 풍성해져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제물도 드릴 수 있을텐데 아브라함은 그렇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것은 더러운 소돔의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이 아님을 그는 알았던 것입니다.

그가 만약 재물에 눈이 멀어서 이 세상의 것에 마음까지 빼앗겼더라면 그것이 더럽든 깨끗하든 상관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겐 집착할 것이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아브라함의 손에는 이 세상의 것들이 아닌 하나님의 축복과 약속, 그리고 그 분의 꿈이 쥐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8. 여기까지 나그네였던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와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한 3 가지를 함께 살펴봤습니다. 하나님의 계약과 약속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라는 것, 또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믿음이 성장한다는 것, 그리고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집착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 3가지는 나그네가 살아갈 때 필요한 필수 조건입니다. 첫째로, 나그네는 하나님의 은혜없이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둘째로, 가족과 친척이 없는 나그네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성장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마지막으로 땅을 소유할 수 없는 나그네는 이 세상에 대한 집착을 버릴 때 하나님의 축복의 땅 하늘나라가 손에 들어옵니다.

우리 예수님도 나그네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 세상에 축복을 가져다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축복 그 자체였기 때문입니다.

죄인들의 희망이 되고 아픈 자들의 치유가 되며 모든 자들의 생명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나그네와 같이 사는 인간에게 구원의 길리 열렸고 나그네와 같은 인간에게 하늘의 본향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가장 비참한 방법으로 이 땅에 오셔야 만 했고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심판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최고의 축복을 위해 예수님은 희생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들을 사랑하사 나그네의 빛이 되어 주신 것입니다.

그 빛을 받은 우리도 나그네의 빛이 되어야만 합니다. 이 세상을 가는 모든 사람이 나그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의 빛입니다.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우리도 가장 작은 자들을 섬기고 서로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는 복의 근원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하나님 자신이 아브라함에게 축복이었기 때문입니다. 나그네의 축복, 그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고아와 같이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나그네가 성공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공식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아브라함의 생애에도 꾸준히 나타나는 축복 공식입니다. 우리들의 축복 공식이기도 합니다.

GOOD-GOD=O
O+GOD=GOOD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생각해도 그곳에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 가치가 없다는 것. 반대로 아무 가치가 없어 보이는 곳에 하나님이 계신다면 그것은 가장 좋은 것이라는 것.

하나님이 계시는 곳에 나아갑시다. 하나님이 인도하실 곳으로 떠납시다. 그리하면 우리들도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너는 축복이 되리라고 하나님은 약속해주실 것입니다.

O+GOD=GOOD

당신은 반드시 축복이 될지라.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이곳에 모이신 모든 나그네 분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