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7월7일 주일예배
「종의 자격」
사도행전26:30-32
설교 조용길 목사

 

오늘 본문은 바울이 로마로 이송되기 전, 가이사랴 감옥에서의 마지막 변론이 끝난 장면입니다. 마지막으로 주어진 변론의 시간에 바울은 자신의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였습니다. 몇 번이나 강조했습니다만, ‘나의 하나님’이 있다는 것은 대단히 가슴 뛰는 일입니다. 나의 하나님은 나의 인생의 이야기 안에 살아있습니다. 남의 이야기에서 은혜받는 것은 얼마 가지 못합니다. 잠시의 자극이 될 뿐 신앙의 뼈대와 근육을 만들지 못합니다. 유튜브에서 유명한 설교자의 설교나 놀라운 간증을 듣는 것보다 자신의 묵상의 시간을 늘리십시오. 그리고 자신의 신앙을 글로 써 보십시오. 자신의 머리와 마음으로 생각하고 자신의 말로 써보십시오. 남의 이야기 듣지 않아도 내 안에서의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것을 곧 알게 될 것입니다. 누군가와 신앙의 좋은 친구와 대화를 나누어 나면 은혜를 경험합니다.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것이 설교를 듣는 것 보다 더 많은 은혜를 받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신앙의 생각을 말로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표현하고 나면 그 은혜가 커집니다. 누군가의 어떤 위대한 간증도 나의 하나님보다는 작은 것입니다. 자신의 하나님을 증거해야 합니다. 바울의 그 증거라는 것은 대단히 강력한 것이어서 제3자가 들을 때는 신비적으로 들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의 입장에서는 신비주의라는 것은 늘 경계해야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에게 있어서 신비라는 것은 없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그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신비를 추구하면 함정에 걸릴 수 있는 위험이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하나님에게 있어서 신비를 부정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신 일들을 곱씹어 보면 그것을 신비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신비를 인간의 합리로 제한해서는 안됩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도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도 있고, 성령을 믿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입으로는 믿는다고 하지만 사실상 믿지 않습니다. 그런 경우에 성경, 또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고 하지만 그것이 대립된 것은 아닙니다. 같은 말입니다. 성경이 부활을 증거하고 있고, 성령이 없이는 성경을 읽어도 그 진정한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들이 다 신비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의 능력을 믿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기도의 능력 그것도 신비입니다. 결국 이런 신비를 믿지 못한다면 제일 중요한 신비,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구원의 신비’를 알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러한 신비들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 문제를 피해 갈 수 없었기 때문에 바울은 미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에게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지금껏 감금되어 있던 바울의 대처를 읽어왔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바울이 무리하게 말하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우리들의 합리에서 본다면 냉정하게 양보할 것을 양보하고, 지혜롭게 대처하여서 지금의 법으로 한다면 집행유예 등으로 석방되어 나오는 것이 최선입니다. 그런 다음에 상황을 봐서 선교활동을 재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합리적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듣고 있는 사람들의 합리성에 호소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합리적 변호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신비를 설교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나타나신 사랑을 전할 때 그 신비를 빼고는 전할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신비로운 간증을 들은 베스도는 바울이 공부를 많이 해서 미쳤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듣기에는 바울이 신비적인 이야기 즉 합리성이 결여된 무리한 말들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그들이 바로 알아 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울이 이미 시행착오를 통해서 공부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철학의 도시 아테네에서 전도할 때 바울은 자신의 지적 능력을 믿고 합리적 논리로 대응하다가 전도의 실패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때 바울은 다짐했습니다. “나는 이제 인간의 합리성 안에서 설교하지 않겠노라.” 그래서 고린도교회를 개척할 때,
고린도전서 2장에서
2: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아테네의 경험에서 그것을 결심했다는 것입니다. 2절은 일본어 번역이 더 정확합니다. 한국어에는 없지만 원어에는 ‘왜냐하면’ 이라는 접속사가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비밀을 아름다운 말이나 지혜로 전하지 않은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전한 ‘하나님의 증거’는 일본어에서는 ‘神の奥義’ 라고 번역했는데, 원래 μυστήριον, ‘하나님의 신비’ 또는 ‘하나님의 비밀’이라는 말입니다. 미스테리의 어원이겠지요. 그리스도의 신비한 비밀을 전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당연히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해야만 말할 수 있는 신비로운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 신비와 비밀은 공개되어 있으나, 깨닫는 사람은 많지 않고, 들으려는 사람도 많지 않습니다. 복음은 숨겨져 있지 않지만 여전히 비밀스럽고 신비로운 것입니다.그래서 십자가의 복음은 있는 그대로 신비 그대로 담대하게 전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들은 사람들은 합리성이 없다고 말할 것이고 바울에게처럼 미쳤다고 말할 것입니다. 복음을 더 장식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진실로 믿는 믿음이 있으면 됩니다. 사람들은 표현을 보지 않고 이 사람이 말하는 것이 진정인가 아닌가 진위를 봅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름다운 말, 즉 문학적 수사나, 지혜의 말, 즉 철학과 학문의 언어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신비한 비밀 그 자체를 전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선교의 시행착오를 다 겪은 후였고 지금 가이사랴의 감옥에서도 변함없이 그 선교 즉 복음증거에 있어서 원칙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재판에 대한 바울의 대처에 무리하다고 말했습니다만, 우리는 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 ‘무리(無理)’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사전에서 무리라는 말은 ‘이치가 없는 것’, ‘理を欠くこと’입니다. 원래는 이치에 맞는 것이 합리(合理)이고,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 무리(無理)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이 사람의 상식을 넘어서 일하고 계신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理가 없는 무리가 아니라, 理를 넘어서는 초월을 말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신비를 증거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초월적 신비가 있다면 중에 으뜸인 것은 무엇입니까? 부활입니까? 천국입니까? 가장 궁극적인 신비는 ‘사랑’입니다. 부활과 천국이라는 신비도 결국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기 위해서 있는 것들입니다. 가장 신비로운 힘은 사랑입니다. 가장 큰 신비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 비밀입니다. 사랑이 신비인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가지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은 전혀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사랑은 설명할 수 없는 신비입니다. 예수의 부활을 믿지 않는데 자신의 부활을 믿을 수 없습니다. 부활의 신앙이 없는데 하나님의 사랑을 믿을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성령을 믿지 않는데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기도의 능력을 믿지 않는데 기도할 리는 없습니다. 비록 미쳤다는 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변론을 들었던 사람들은 이 사건에 대해서 바울에게 법적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는 판단을 한 것 같습니다. 상소하여 로마에 재판 받게 되어 있지 않다면 이 시점에서 무죄석방할 수 있었을텐데 라고 아그립바 왕은 베스도 총독에게 말합니다.안타깝습니다. 좀 더 일찍 아그립바왕이 와서 이런 조언을 할 수 있었다면 옥살이 하지 않고 석방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석방되었다면 바울을 죽이기 위한 유대인 암살단에 의해서 바울은 죽었을 것입니다. 감금된 상태로 로마에 갔기 때문에 바울의 안전이 지켜졌습니다. 손자의 말에 필사즉생 행생즉사 (必死則生 幸生則死) 라는 말이 있습니다. 死を必すれば則ち生き、生を幸えば則ち死す。라는 말이 있습니다. 죽으려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마태복음에도
16: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바울은 자신은 안전을 위해서 이것을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선교적 목적으로 적극적으로 로마로 갈 방법을 찾고 있었습니다. 로마에 가는 것이야말로 죽을 각오를 한 것입니다.

오늘 여기서 바울의 심중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봅시다. 바울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왜 이토록 무리해서 로마에 가려는 것입니까? 로마라는 지역에 가는 것 그 자체가 사명입니까? 거기서 순교하는 것이 사명입니까? 바울도 기도해야하는 사람이었을 것이고, 상황에 따라 민감하게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은 우리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런 바울은 어떤 이유로 이 로마행에 대해서 확신할 수 있었던 것입니까? 그것을 알면 우리도 어떤 상황에서 어떤 순종을 해야하는지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지난주 달란트의 비유를 소개했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한 달란트 받은 사람도 한 달란트를 소실한 사람은 아니었다 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도 그것을 잃어버리지 않고 잘 보전하고 지킨 사람입니다. 25:24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25:25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25: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25:27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 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
25:28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25: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25: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이것이 한 달란트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면 칭찬받은 종,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무엇이 달랐던 것입니까?
25:16 다섯 달란트 받은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25:17 두 달란트를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
25:20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5: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고
25:22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5:23 主人は彼に言った。『よくやった。良い忠実なしもべだ。おまえはわずかな物に忠実だったから、多くの物を任せよう。主人の喜びをともに喜んでくれ。』
25: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고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은 사람에 대한 상과 칭찬이 똑같습니다. 그러니까 금액의 차이, 크고 작은 것의 차이가 아니고 자신의 가진 것,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안에서 얼마나 ‘적극적’이고 ‘창의적’으로 주인의 즐거움을 위해서 일했는가 입니다. 여기서 이 ‘적극성’과 ‘창의성’이라는 일하는 과정의 자세라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적극성이 없으면 종의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창의성이 없어도 종의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종은 역할을 외워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마음을 읽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직장에서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혹시 우리 중에 직장에서 리더의 역할을 하고 계신 분이 계십니까? 그분에게 물어보십시오. 시키는 일만 하는 직원을 높이 평가하는 오너는 없습니다. 어떤 조직도 시킨 일만 하여 현상을 유지하려고 하는 사람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창의성과 적극성을 가지고 생산성을 높이고 일의 진전시켜나가는 사람이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이 달란트를 남깁니다. 그렇다면 그 동력은 무엇입니까? 책임입니까? 아닙니다. 유지해야할 책임이 아니라 성장을 통해서 주인을 기쁘게 하기 위한 동기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배워야하는 바울의 동력, 선교의 동기입니다.
골로새서 3장에서
3:22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3:23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하고 사람에게 하듯하지 말라
이 말씀에 순종했는데 성공하지 못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사명은 무엇입니까?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그것을 지키는 것을 사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에 대해서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오해하는 것은 이토록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나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했습니다. 무엇이 달랐습니까? 한 달란트를 환산하면 20억원이 넘습니다. 다섯 달란트면 100억입니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분명히 자금운용에 대해서 기획하고 실행했을 것입니다. 투자에 위험부담도 있었을 것이고, 위기도 있었을 것입니다. 피곤해도 밤에 자지 않고 경영과 투자에 관한 공부를 해야 했을 지도 모릅니다. 자격도 따고 시험도 쳐야 했습니다. 낮에는 사람들을 만나 영업해야 했을 것입니다. 분노할 일이 있어도 주의 일로 인해서 인내했을 것입니다. 지혜를 구하면서 기도해야 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신뢰를 받아야 했고, 인사를 관리해야 했을 겁니다. 그렇게 주어진 일의 전진을 위한 계획을 세우고 실행해야 했습니다. 교회 봉사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역할분담을 잘해서 누군가에게 봉사가 치중되지 않게 하는 것이 최선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이것에 대해서는 창의성과 적극성이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인지에 대한 적극적이고 창의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전도와 선교에 대해서는 어떠십니까? 하나님이 하시는대로만 기다리고 계십니까? 내 힘으로 하지 않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기다리고 계십니까? 그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하고 계십니까? 그것은 이 세 사람 중에서 누구의 자세입니까?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다시는 그 은사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어차피 하나님은 전지하시고 전능하시니 다 알아서 하시는 분이시니까 나는 하나님을 믿고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 생활을 허송세월로 만드는 하나님에 대한 오해입니다. 기다리는 사람은 사명자가 아닙니다. 기다리는 것은 누구나 합니다. 없는데 기다릴 수 밖에 없지요. 하나님의 영광을 하나님에게 맡기고 나는 기다리기만 한다면 그 영광은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나를 위한 영광입니까. 하나님을 위한 영광입니까. 종은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고 주인의 마음을 읽고 언제 어떻게 일해야 하는지를 알아서 적극적으로 일을 열어가는 사람입니다.
세례요한에게 인용된 이사야의 예언
40:3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40:4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토목공사입니다. 그 길을 만들어 가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합니다.
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만약 바울이 한 달란트는 받은 사람이라면 바울은 결코 로마에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은 결국 모르는 것이기 때문에 물이 흘러가는 대로 바람이 부는 대로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에게 사명이 있었다는 말,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었다는 말은 곧 바울이 선교에 있어서 유지하는 책임이 아닙니다. 성장하는 책임, 즉 창의성과 적극성을 가지고 전진해 나가는 선교를 했다는 말입니다. 한 달란트의 사람은 그것도 빼앗기고 다섯 달란트의 사람은 열한 달란트가 됩니다.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해야만 하는 것, 또는 해서는 안되는 것으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듯이, 정해진 일을 하는 것이 사명이 아닙니다. 사명은 그런 피동적이고 소극적인 것이 아닙니다. 기획하고 준비하고 조사하고 조직을 만들고 역할을 분담하고 위기를 맞아도 용기를 내어서 도전하고 실천하는 사람이 사명의 사람입니다.

저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 비유에서 다른 경우는 왜 소개하지 않는 것일까? 열심히 했지만 손해본 사람도 있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예컨대 두 달란트 받았지만 한 달란트는 손해보고 한 달란트만 남긴 사람도 있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마도 통전적으로 이해했을 때, 열심히 했는데 결과적으로 손해를 본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저 한 달란트를 묻어둔 사람보다는 평가가 좋았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비유의 가르침에서 그런 경우의 수가 존재도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실패는 없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시련은 있어서 실패는 없습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의 불순종만 있을 뿐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하려고 하는 선교는 하나님에게 속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니 이 일에 대해서 적극성과 창의성이야말로 우리에게 꼭 필요한 달란트입니다. 바울은 로마제국의 심장으로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그것은 나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한 적극성과 창의성이 없이는 생각하지 못할 일입니다. 이것이 종의 자격입니다.
그러니 오늘 아그립바왕이 말한 것
26:31 … 이 사람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만한 행사가 없다 하더라
26:32 이에 아그립바가 베스도더러 일러 가로되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호소하지 아니하였더면 놓을 수 있을뻔하였다 하니라
사서 고생한다는 말입니다. 아그립바의 말은 지금 바울이 고생을 사서 하고 있다는 말이겠지요. 가만히 있으면 석방되었을 텐데 바울이 무리하게 오버해서 오히려 석방시키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기쁘시게 하는 일에 적극적이고 창의적이지 않았다면 사서 고생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기다리는 것은 우리가 아니고 하나님이리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선교를 위해 헌신하고 순종할 사람을 기다리시는 것은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순종하는 종에게 공급하시는 분도 하나님입니다. 한 달란트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바울이 현실에 안주했다면 잘 성장하고 있는 에베소에서 담임목사하면서 지냈을지도 모릅니다. 아예 전도자가 되지도 않고 출세했을 지도 모르지요. 고생이 두렵다면 그것이 어찌 종이겠습니까? 그러나 주인은 반드시 오셔서 결산하십니다. 여기서 종은 목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목사에게 주의 종이라는 말을 잘 사용 하지 않습니다. 주의 종이라는 말에는 이상하게 왜곡된 권위의식이 있습니다. 말은 종이라고 하는데 ‘주의 종’이라는 말은 종교적 상전으로 쓰이는 것 같습니다. 주의 종이 아닌 사람이 어디있습니까? 하나님의 성도로 부름받은 모든 백성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종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립니다” 라고 말하면 믿음이 좋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십니까? 그러나 마냥 기다리고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결단코 오지 않을 겁니다.
17:20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17:21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우리 안에 하나님 나라가 있습니다. 발견하는 사람만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주인의 뜻을 알아서 사서 고생하는 사람들입니다. 주인의 마음 하나님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선교를 위해 준비하고 또 기획하고 헌신하여 그것을 넓혀가는 사람들이 이미 하나님 나라를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야말로 하나님의 나라를 보는 특권을 가질 것입니다. 이 비밀스러운 영적 원리가 가정에도 직장에도 학교에도 우리 교회에도 그리고 우리의 선교의 사명에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에 적용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