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흘러서 오늘 27장에 들어왔습니다. 막바지에 온 것 같습니다. 복음이 제국의 수도 로마까지 들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사도행전은 끝을 맺어갑니다. 주일 저녁 성경공부회에 오랫동안 요한일서로 공부했는데 지난주에 끝났습니다. 마치고 보니 짧은 요한일서를 아주 깊이 읽고 공부했다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이 끝나면 우리에게도 사도행전을 잘 이해한 믿음이 뿌리처럼 내리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바울이 로마로 출발한 것은 A.D. 60년 가을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지만 바울이 탄 배가 표류하게 되고 3개월을 한 섬에 정박하여 머물게 되기 때문에 이듬해인 A.D. 61년 봄에 로마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리고 61년부터 63년까지 만 2년 조금 넘게 로마에서 가택 연금상태에 처해지게 되는데 이 시기를 바울의 제 1차 로마 투옥시기라고 부릅니다. 바울은 이 1차 투옥 기간 동안에 이른바 옥중서신이라고 하는 에베소서, 빌립보서,골로새서,빌레몬서를 기록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은 로마로 들어가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이 나지만 신약성경으로 합본되어 있는 옥중서신을 펼쳐서 읽으면, 즉 페이지에서 페이지를 펼치기만 하면 우리는 그 이후 바울의 선교의 연장을 계속해서 읽을 수가 있습니다. 사도행전도 원래 누가복음에서부터 이어져 있는 책이었습니다. 로마 입성 후 바울이 에베소에 써 보낸 편지를 처음 읽었던 사람이 있다면 그것이 얼마나 큰 흥분이었을지를 생각하면서 성경의 책장을 넘기시기를 바랍니다. 옥중서신 중에서 사도바울의 전도와 교회 개척의 경험과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망라된 교회론이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입니다. 말년에 바울의 신학적 관심은 교회로 집중되거든요. 우리는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해야하고 여기에서부터 교회에 대해서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을 통해서 복음의 활동으로서의 선교에 대해서 읽어왔다면, 에베소서는 복음의 거점으로서의 교회에 대해서 말합니다. 건강한 교회를 배우는 의미에서 에베소서를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 전에 우리는 오늘 당장 직면한 사도행전 27장, 지중해에 불고 있는 광풍을 뚫고 지나가야 합니다. 누가는 이 항해 여정을 대단히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중해를 횡단하는 낯선 지명과 혼란스러운 상황이 묘사되어 있는데 머리에 전체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으니 준비한 화면의 그림으로 전체 동선을 설명해 보겠습니다. 60년 초가을 바울이 탄 배는 가이사랴에서 출발하여 시돈을 경유한 뒤 지중해의 구브로섬의 동부 연안을 따라 항해합니다. 지중해의 서풍을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소아시아의 길리기아와 밤빌리아 연안을 따라서 무라에 도착합니다. 무라에서 바울 일행은 배에서 내려서 알례산드리아에서 출발해서 배로 갈아탑니다. 가이사랴에서 로마까지 직행 항로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배가 나가려는 방향은 서쪽인데 북서풍이 계속 불어오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당시 배는 범선이니 배는 앞으로 나가지 못했습니다. 북서풍이 점점 강해져서 도저히 거슬러 항해할 수 없게 되자 배는 직선 항해를 포기하고 니도 앞바다에서 항로를 바꾸어서 남쪽으로 내려갑니다. 남쪽에 그레데섬이 있거든요. 바람을 타고 남쪽 그레데 섬으로 가서 배를 피신시켜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레데 섬의 남단에 있는 미항이라는 곳에 도착하게 됩니다. 큰 사고 없이 항구에 잘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돌발적인 상황이 아니고 이 시기에는 강한 북서풍이 분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습니다. 지중해를 항해하기에 9월 중순부터 3월까지는 대단히 위험한 시기입니다. 아예 11월 중순부터 1월 사이에는 항해가 전면 중단되었답니다. 그런데 9절에 보면 미항에 도착할 때가 이미 10월경이었습니다. 이미 위험했습니다.

바울만큼 여행을 많이 다닌 사람도 없지요. 바울은 지중해의 기후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항해를 계속하면 선적한 재산들 뿐 아니라 탑승자들의 목숨도 위험하게 될 것이니 지금 정박해 있는 그레데섬의 미항이라는 곳에서 겨울을 보내야한다고 제안했습니다. 죄수 신분이면서 큰 소리로 말도 참 잘하는 것 같습니다. 벡부장과 선주 측도 겨울이 지나가기 전에 로마까지 갈 수는 없다는 판단에는 바울의 의견에 이의가 없었습니다. 다만 지금 정박해 있는 미항은 너무 작은 항구라서 겨울나기가 불편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승선자만 300명 가까이 되지 않습니까? 숙박과 식사 등이 곤란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선장과 선주는 거기서 한 60킬로만 더 가면 있는 뵈닉스라는 곳이 있는데 그곳은 더 큰 항구이니 거기로 이동해서 겨울을 보내려고 했습니다. 바람만 좋으면 두어 시간에 갈 수 있는 거리입니다. 당시 백부장은 바울의 말보다 선주와 선장의 말을 더 신뢰했기 때문에 바울이 머물자고 제안한 미항을 떠나 여건이 더 좋은 뵈닉스 항구로 항하게 됩니다. 미항에 도착할 때도 간신히 도착했다고 했는데 다시 위기를 기억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결국 배가 다시 출발했고 처음엔 남풍을 만나 순조롭게 진행되는가 싶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광풍을 만나게 됩니다. 바울이 탄 배는 그 때부터 14일간이나 무서운 유라굴로 광풍에 휘말려서 바다 위를 표류하게 됩니다. 결국 바울의 우려가 현실이 되었습니다. 위험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항해를 강행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경험과 현재의 처지를 보고 행동을 결정합니다. 이들이 다소 위험한 항해를 시도한 것은 배의 규모와 안전성을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60킬로 정도 거리이니 연안을 따라 가면 괜찮을 것이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이른바 전문가인 선장과 선주의 판단은 그랬고 호송 장교는 그들의 말을 신뢰했습니다. 이 배는 가이사랴에서 타고 온 배가 아닙니다. 바울 일행은 무라에 도착해서 알렉산드리아에서 온 배로 한 번 갈아탔지요. 갈아탄 이 배는 가이사랴에서 타고 온 작은 배가 아닙니다. 당시 북 아프리카의 알렉산드리아는 지중해의 거점 중에서도 거점 도시였습니다. 배에는 식민지에서 거둬들인 수많은 양의 곡물을 실려 있었고 승선자가 무려 276명이었습니다. 2천년 전의 이런 선박규모라면 최대급입니다. 100년전의 타이타닉에 비교할 수 있겠지요. 타이타닉은 5만톤급 선박입니다. 타이타닉 호는 1912년 대서양에서 침몰해서 1500명이 희생된 사건이지요. 방수 구획만 16구획이 있었답니다. 침수에 대비해서 16겹의 안전장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절대로 침몰할 수 없는 배, 불침선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던 배가 타이타닉호입니다. 그러나 결국 대서양에서 가라앉았습니다.
바울이 탄 배는 당시에 안전성으로 치면 마치 타이티닉 같은 배였습니다. 그들은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규모와 안전성을 믿었습니다.

다시 한번 동선을 확인해 보겠습니다. 가이사랴에서 출발한 배는 처음부터 이 시기에는 지중해가 무서워서 지중해로 나가지 않습니다. 직선 코스로 가면 더 빠르지만 북쪽으로 거슬러 올라가 연안을 따라 항해하다가 배를 갈아타고 나서 그레데 섬 위쪽 에게해를 통해서 아드리아해를 지나 살금살금 지나가려고 했습니다. 지금의 시칠리아와 이탈리아의 사이, 메시나 해협을 통과해서 로마로 가려고 했습니다. 가을 이후에는 북서풍이 불어와서 배를 자꾸 지중해로 밀어냅니다. 그런데 무라에서 갈아탄 배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왔습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무라로 오려면 지중해를 종단해서 와야 합니다. 기본적으로 대형 선박입니다. 급이 다리고 자신감이 다릅니다. 그래서 방금까지 지중해를 가로질러 온 이 배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것에 신뢰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흔드실 때 사람이 확보할 수 있는 안전이라는 것이 있습니까? 강해진 북서풍의 영향으로 밑으로 밀려와서 미항에 도착했을 때 바울의 말대로 미항에서 떠나지 않고 기다렸어야 했는데 배는 지중해를 끼고 뵈닉스를 향해서 항해를 계속합니다. 그런데 거기서 폭풍을 만나버린 것입니다. 이름이 유라굴로라는 광풍입니다. 원래 발음이 ‘유로클리돈’인데 유로스가 남동풍이라는 말이고 ‘클리돈’은 폭풍입니다. 그러니 남동풍의 폭풍이라는 말이지요. 미항에서 뵈닉스로 갈 때 잠시 남풍이 불어서 순조로운 때가 있지 않았습니까? 바울은 분명 그 순풍을 걱정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곧 폭풍을 만난다는 전조였기 때문입니다.

기어이 그 짦은 코스가 채 끝나기도 전에 풍랑이 휘몰아치기 시작하면서 대책없이 배가 휘말려 버렸습니다. 배는 14일간 폭풍의 바다 위를 표류합니다. 저는 대학시절에 작은 배를 타고 남해의 섬에 들어갔다가 태풍을 만나 배가 뒤집어질 것 같은 위기를 맞은 적이 있습니다. 덮쳐오는 바다를 보면 정말 무섭습니다. 바다에 떠다니는 미물 하나보다도 작고 연약한 자신을 발견합니다. 14일간 흔들리는 풍랑 속에서 산다는 것은 지옥이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27:18 우리가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
27:19 사흘째 되는 날에 배의 기구를 저희 손으로 내어 버리니라
27:20 여러 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더라
27:21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배를 가볍게 하기 위해 버릴 것은 다 버렸습니다. 겨울 산에서 조난당한 사람이 추위를 이기기 위해 돈을 태우면서 버텼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얼어 죽을 판인데 돈이 무슨 소용입니까? 얼마든지 태우지요. 없어서 못 태우지 아까워서 못 태우겠습니까? 쌀이든 돈이든 금이든 무거운 것부터 바다에 내다 버렸습니다. 생명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을 알기 시작하면 생명 아닌 것을 버립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인간은 그것이 좋아서 생명도 버리고 믿음도 내다버립니다.

배 멀미 해보셨습니까? 차 멀미는 멀미도 아닙니다. 모조리 다 올라 옵니다. 배가 지속적으로 흔들리면 멀미로 모조리 토해냅니다. 다 버렸으니 소유한 것도 없고 다 토해냈으니 힘도 없고 자신도 없습니다. 소망도 없습니다. 승선자들은 육체적 탈진과 정신적 패닉 영적 절망 속에 있었습니다. 이것이 일상의 안전과 일용한 양식으로 하나님이 위로해주시기 전의 인간의 본질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그것이 유지되는 것이 행복입니다. 하나님 없는 행복은 없어요. 찾아가 보십시오. 행복은 없습니다. 비참한 인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가 곧 행복입니다. 27장은 바울의 영웅담으로 읽으면 안되고 지치고 절망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현실로 읽어야 합니다. 바울도 토해낼 것 다 토해내고 지칠 대로 지쳐있을 것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래서 역설이지만 그 배에 타고 있었던 사람들이야말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간은 구원이 이루어지기에 합당한 시간이었습니다. 구원은 절망 속에서만 진실하게 감격스러운 은혜가 되는 것이니까요. 다 버리고 다 토해내고 자신에게 절망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순간, 자신이 믿었던 힘이 얼마나 치사하고 부끄러운 것인지 알게 되는 순간, 그 절망의 순간에 구원이 임하는 것입니다.

가끔 하나님에게 실망하고 시험에 들었다는 말을 합니다만, 그것은 아직 살 만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하나님에게 실망했다는 것은 아직 자신에게 절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로 믿는다고 했다고 구원을 받는 것일 수가 없습니다. 믿음이라고 하더라도 그 믿음이라는 사건의 진위를 확인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슨 이유로 믿었는가 라는 말입니다.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을 깨달아서 믿었어야 그것이 구원에 이르는 믿음입니다. 14일간의 풍랑은 그것을 위한 시간입니다. 투자의 천재라는 워렌 버핏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비를 예측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방주는 짓는 것이 중요하다. 광풍은 올 줄 알았습니다. 무릎이 아프면 비가 온다는 것을 압니다. 문제는 하나님이라는 방주를 만들지 않는 것입니다. 구원은 인간의 절망을 경험한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하나님의 기적입니다.

이 사건의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바울의 예언대로 배에 승선한 276명 전원이 구조됩니다. 무엇을 말씀하기 위해서 입니까? 절망 속의 인간을 구원하시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이야기입니다. 누구를 통해서 입니까? 로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야 할 바울을 통해서입니다. 그것을 누가는 놓치지 않고 자세하게 기록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울의 선교사역을 얼마나 극적이며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있는 지를 보십시오. 선장의 말만 듣던 백부장이 나중에 바울을 신뢰하고 죄수들을 잃을 각오를 하고 죄수를 죽이지 않지요. 빌립보의 간수 기억하십니까? 죄수가 도망간 줄 알고 자결하려고 했지 않습니까? 죄수를 잃어버리면 사형입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자기 목숨을 걸고 바울을 지키기 위해 죄수들이 헤엄쳐서 뭍으로 나가게 합니다. 3개월 동안 바울을 통해서 이 사람들이 무엇을 듣고 어떻게 변했을지는 설명이 없어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디였습니까? 신기하게도 광풍은 바울이 탄 배를 목적지인 이탈리아 반도의 남쪽섬에 데려다 주셨습니다. 불순종한 요나 이야기 잘 아시죠? 불순종한 요나를 삼켰던 물고기가 요나를 다시 뱉어낸 곳이 어디인지 아십니까? 원래 삼켰던 그 자리입니다. 불순종이라는 것은 그것으로 통과되는 것이 아니고 원위치로 돌아와서 다시 해야하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하나님이 잊어버리십니까? 하나님은 순종한 사람에게 더 큰 순종을 요구하시고 순종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불순종의 고생을 반복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사명을 받은 사람은 어느 쪽을 선택하든 힘듭니다. 다만 하나님 안에서 수고할 것인지, 하나님 밖에서 고생할 것인지의 문제만 남는 것입니다. 바울의 배가 닿은 항구는 어디였습니까? 이탈리아 반도입니다. 로마가 있는 곳, 곧 목적지입니다. 아프리카 대륙으로 안가고 이탈리아 반도로 갔습니다. 가야할 곳에 갔습니다. 요나의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요나의 경우나 바울의 경우나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일은 방해 받지 않고 반드시 성취됩니다. 우리의 불순종이 하나님의 일을 방해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감히 하나님의 일을 방해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오직 순종과 불순종만이 있을 뿐입니다. 지난 주 말씀드렸던 소극성과 적극성에 따라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기도 하고 고생만 반복하기도 하기도 하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믿음은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이지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 때문에 손해보지 않으십니다.

기어이 에루살렘으로 간 예수님, 그리고 기어이 로마로 간 바울, 존 스토트는 누가복음이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즉 예수님의 동선이었다면 사도행전은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라고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은 예수님의 사역의 목적지였고 로마는 바울의 사역의 목적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그 사도 바울도 다 적극적 사명의 길을 걸었습니다. 우리는 예루살렘과 로마에 가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의 적극성을 가지고 우리의 가야할 곳에 가서 선교를 하면 됩니다. 풍랑은 신시루가 아니었습니다. 확실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누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한다는 말입니까? 풍랑은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오히려 진전했습니다. 바울이 2년간 로마에서 구금된 기간 동안에 바울은 다시 신학을 정리하고 서신을 보내서 교회를 세워갑니다. 풍랑도 구금도 결과는 다 전진이었습니다. 지난주에 설교한 다섯 달란트 종에게는 이런 위기들이 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선교의 진전의 기회였지만, 한 달란트의 종에게는 그저 귀찮은 일이고 자신에게 손해되는 일이고 고생일 뿐이었습니다. 한 달란트의 종이 쫓겨나가 슬피 울며 이를 갈 때 무슨 생각을 하는 줄 아십니까? 십중팔구 주인을 원망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것보다 더 크고 놀라운 방법으로 응답하시는 분입니다. 교회의 재산은 간증의 축적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응답이 지체된다면 거기에는 더 크고 놀라운 방법으로 응답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태해도 안되고 조급해도 안됩니다. 상황과 때를 분별하는 것은 성령의 은혜입니다. 우리의 계획과 기도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항해하고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풍랑에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이 기회가 될 것이고 그것이 곧 길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