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 설교 제목이 「로마의 성경강좌」였습니다. 바울은 로마에서 가택연금된 상태였고 로마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은 바울의 집으로 찾아와서 바울에게서 이른바 기독교 입문 강의를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관심이 많았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쉬지 않고 복음을 강의했습니다. 복음을 체험하고 복음을 확신하고 복음을 말하는 사람은 복음에 대해서 절실합니다.

얼마전 저에게도 그 절실함에 대한 경험이 있습니다. 고향의 집 동경에서 한달에 한번 기도회를 하고 있습니다. 어르신 열 분에서 열 다섯 분 정도가 모이십니다. 주로 여성들이 모이는 모임에 빠지지 않고 항상 성실하게 오시는 남성 분이 계셨습니다. 물론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계신 분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배에 늘 참석하고 기도회에 빠지지 않고 와서 늘 기도를 부탁하던 분이었습니다. 저는 이분이라면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고 세례도 받을 수 있겠다고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잠시 한국에 다녀온 사이에 그분은 병원에 입원하셨습니다. 그 다음 번 기도회에도 안 오시길래 시설에 아직 퇴원 안 하셨는지를 물어 보았습니다. 이 분의 이야기를 과거형으로 썼기 때문에 짐작하셨겠지만 병원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몸에 불편한 부분이 있어서 걷지는 못하시는 분이었습니다만 건강해 보였거든요. 돌아가실 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병원에 병문안을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중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저에게는 어떤 죄책감이 있습니다. 만약 저에게 복음이 없었더라면 그분에 대해서 죄책감을 가질 이유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가진 사람은 복음을 전하는 것에 절실한 것입니다. 믿습니까? 안 믿습니까? 를 매번 말하면 그것이 부담을 줄까봐 조심스럽게만 접근한 것을 회개했습니다. 그분에 대해서는 확정적으로 확인받지는 못했기 때문에 모르겠지만 예배와 기도회에 참석해서 들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분에게 구원의 기회가 되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기도회 때마다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영접기도를 할 생각입니다. 물론 강요하지 않습니다. 강요해서 믿어진다면 강요할 것이고 속여서 믿어진다면 얼마든지 속이겠지만 믿음은 진실과 자유 안에서만 구원의 능력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게 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소식을 전하는 것 뿐입니다.

바울도 그랬을 것입니다. 묶여 있기 때문에 나갈 수 없지 않습니까? 자기 발로 자기 집에 찾아와서 기독교 신앙 강의를 듣고 있는 이 사람들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바울은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절실함으로 강의했을 것입니다. 거짓도 없고 강제도 있을 수 없습니다. 믿지 않더라도 믿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복음의 정보를 있는 그대로 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전도자에게 있지 않고 성령 하나님의 역할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성경강좌의 결과입니다. -28:24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는 것은 당연한 결과일텐데 그러나 한편 믿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바울이 강의하는 기독교의 세계관과 기존의 유대교의 세계관은 다른 것입니다. 그들이 살고 있던 로마의 세계관은 더 다른 것입니다. 그 짧은 기간 동안 기독교 입문 강좌를 듣고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 놀라운 일입니다. 바울이 어떤 강의를 했는지 그 강의안은 남아있지 않지만 우리는 그 내용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바울서간을 읽어 보시면 바울의 강의 내용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후서 디모데전후서 디도서 빌레몬서 다 읽어보셨습니까? 틀림없이 바울은 그것과 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울의 강좌가 어떤 것이었는지 궁금하시면 꼭 읽어보십시오. 유대인은 하나님께 선택받은 민족이고 하나님이 자신들에게만 주신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하나님께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율법을 의지적으로 완전하게 지켜내는 것은 불가능하며, 인간은 율법을 지키는 것을 통해 인간 본연의 절망에서부터 해방될 수가 없습니다. 죽음은 죄의 결과입니다. 율법을 지키고 산다고 해도 아무도 죽음을 피해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구원을 이루어 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 율법의 궁극적 목적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인간에게 죄가 없는데 그리스도가 인간을 대신해서 죄의 삯 즉 십자가에서 피 흘리면서 죽어서 구원을 성취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인정하던 인정하지 않던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인간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의 삯은 그 때 지불완료된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구원입니다. 율법준수가 구원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는 지금껏 들어온 당연한 복음의 이해이겠지만 당시 유대인에게 있어서는 놀랍고 혁명적인 해석입니다. 율법준수에는 종교적 의가 있지만 십자가의 믿음에는 죄에 대한 인정과 항복이 있습니다. 정반대입니다.

그래서 그 강의를 듣고 믿은 사람도 있었지만 당연히 믿지 않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믿은 사람들과 믿지 않은 사람들이 충돌을 일으켰습니다. 사실 복음을 접한 인간에게 혼란과 갈등과 충돌은 불가피합니다. 우선 자기자신과 충돌하고 자신과 세상도 갈등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구원의 전제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전제라는 것은 율법준수의 의가 아니고 인간의 죄의 인정입니다. 자신만만한 것이 믿음이 아니고 자신의 비참함을 아는 것이 은혜입니다. 바울은 강의에서 절실한 마음으로 구원의 정보를 말해야 하기 때문에 혼란과 갈등을 무릅쓰고도 죄를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이 전도입니다. 죄를 말하지 않고는 복음을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음 세대에게 신앙을 물려주고 싶거든 아이들이 다른 무엇보다 자기자신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연습을 시켜야 합니다. 회개할 줄 모르는 사람의 성경지식은 무익합니다.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하면 하나님의 복음은 결코 들리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듣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을 강제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복음의 정보가 아무리 인풋되어도 구원의 신앙으로 아웃풋되지 않을테니까요. 하나님의 크심의 발견은 나의 작음의 자각과 동시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 중에 자신의 인생의 길을 스스로 만들어 오신 분 계십니까? 자신의 길을 만들어 왔다는 개척정신을 말할 수 있는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도전정신을 말하는 것이죠. 실제로 없는 길을 만들어 온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모르는 길은 없습니다. 우리는 인생의 길은 만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길은 물어가는 것입니다. 무엇이 길입니까? 어느 길이 내가 걸어가야 할 진짜 길입니까? 그 길을 묻고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전도(伝道)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까? 길은 전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예수님의 이야기 한 구절을 읽겠습니다.-8:45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8:46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는데도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에서 틀린 것을 찾을 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거절과 반대의 타성에 젖어 있었습니다. 오직 반대가 사명입니다. 우리들 내부와 우리를 둘러싼 주위에 자주 있는 일입니다. 진위를 따져보지도 않고 정당한 논의도 하지도 않고 오직 답을 정해두고 그 주장만을 고집하는 것입니다. 사회심리학에서 이런 것을 확증편향이라고 합니다. 자기비판, 자기부정 그런 것 전혀 없습니다. 원래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신념을 확인하려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에게는 반성이나 성찰, 회개는 불가능합니다.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이것이 바로 확증편향입니다. 상대의 변론과 주장은 듣지도 않습니다. 오직 자기적 결론입니다. 천하무적입니다.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슬픈 것은 우리 시대 특히 한국의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이런 현상이 정말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섞여 있는 정도가 아니고 기독교 전체가 그것에 휩싸여 있습니다. 거짓과 진실을 구분하지 않고 문제의식없이 기존의 가치만 외칩니다. 그것을 위해서 거짓과 폭력도 불사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음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병적인 확증편향을 구분하지 못하는 이 시대의 교회의 모습에 우리는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고보면 예수님도 할 수 없는 일이 있었네요. 예수님 끝내 바리새인과 제사장들을 전도하시지 못했습니다. 전도하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그 사람들에게 결국 죽임당하지 않았습니까? 바울도 베드로도 스데반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의 복음이 문제가 아니고 구원받아야 할 죄인임를 인정하지 않는 확증편향을 가진 인간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구원하는 말을 듣지 않으니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귀있는 자는 들으라’ 라고 하신 말씀은 사실 귀로 들으라는 말이 아니로 ‘지각으로 깨달으라’는 말입니다. 듣고 깨달아야 합니다. 혹시 지금도 구원이 여전히 추상적으로 들리십니까? 그것은 듣지도 않고 읽지도 않고 생각하지도 않고 고민하지도 않고 구원에 대해서 깨달을 수 있는 방법은 없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1장에서는 -11:15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11:16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11:17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라고 했습니다. 분명히 피리소리는 들립니다. 우는 소리도 들립니다. 음성정보로는 다 들립니다. 그런데 들어도 그 의미를 구별해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못 듣는 것입니다. 우리는 헤드폰이나 이어폰을 사용할 때 외부의 소리가 크게 들리면 볼륨을 높입니다. 그렇게 해서 외부의 소리를 완전하게 차단합니다. 들리지 않습니다. 그 상태로 지속적으로 게임이나 음악을 들으면 청력은 저하해서 난청이 됩니다. 자기세계에 갇히면 결국 들을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운전해보면 이어폰 끼고 다니는 사람이 참 위험합니다. 마치 지각이 고장 난 것처럼 위험한 보행을 합니다. 그것은 외부세계와 단절된 채 자신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 있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28:26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세상과 인간을 이해합니다. 들으려고 하지 않는 세상과 인간을 향해 끊임없이 말을 걸어야 하는 복음의 사명을 생각하게 합니다. 여전히 믿게 할 수 없지만 여전히 전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또 하나를 생각합니다. 복음을 듣고도 믿지 않은 사람들에게 대해서 그 영적 둔감함을 비난하고 나면 되는 것일까? 예수님이 말하고 이사야가 말하고 바울이 말하고 요한이 말하는 들을 귀라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에게만 필요한 것일까요?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은 소아시아의 일곱교회를 책망합니다. 에베소 교회, 서머나 교회, 버가모 교회, 두아디라 교회, 사데 교회, 빌라델비아 교회, 라오디게아 교회, 초대교회의 찬란한 열심을 가진 교회들을 하나님이 책망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일곱교회에 동일하게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지 않는 사람 뿐 아니라 성도와 교회도 자기를 비우고 하나님 말씀으로 자기를 갱신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혹시 하나님의 말씀을 읽지도 않고 듣지도 않고 그 말씀으로 생각하고 묵상하고 고민하지도 않으면서 자신은 믿음을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안타깝지만 그것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믿음을 믿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과 신념을 믿는 것뿐입니다. 마치 믿지 않고 떠나간 사람들이 자신의 가치를 버리지 못해서 아무리 말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던 확증편향의 사람들처럼 자신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과거의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현재적이어야 합니다. 믿음을 떠나있다가 마음만 먹으면 금방 순종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교회를 떠나 있다가 예배에 회복해서 교회예배에 출석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은 그렇게 쉽게 들리지 않습니다. 듣는 것도 연습이 필요하고 순종하는 것에도 습관이 필요합니다. 먼저 자신의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것을 읽으십시오.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리고 말씀 안에서 사십시오. 그래야 믿을 수 있고 그래야 순종할 수 있습니다. 믿음도 순종도 사건이 아닙니다. 관계 안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신앙에 어떤 사건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일상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그 관계를 회복합시다. 우리 교회와 성도를 통해 복음을 듣는 이가 구원을 받는 은혜, 우리의 믿음이 들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 말씀이 들리고 그것이 깨달아지기는 은혜가 있기를 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