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1:15-19

1:15 이를 인하여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1:16 너희를 인하여 감사하기를 마지아니하고 내가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하노라
1: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18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1:19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믿음은 사랑을 전제하고 사랑은 믿음이 있을 때 온전합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믿음과 사랑을 칭찬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를 시작합니다. 바울이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하기를 ①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시기를 구하고 ②마음눈을 밝아져서 부르심의 소망 즉 소명이 무엇인지 알기를 구하고 ➂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 즉 하나님의 축복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를 알게 되기를 구하고 ④교회와 성도에게 베푸신 능력, 즉 주신 은사가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알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알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곤란의 해결을 기도하기 전에 하나님의 지혜의 음성을 먼저 들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많은 복을 구하기 전에 이미 주신 복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명을 위해서 교회와 성도에게 주신 은사가 무엇인지 알 수 있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매일같이 있으되 그것을 깨달아 알지 못하면 나를 위한 말씀이 아니고 그것을 알고 깨닫는 남의 말씀일 뿐입니다. 물에다 물을 타고 술에다 술을 타도 바뀌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것을 받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화학적 작용을 일으킵니다. 이미 주신 하나님의 축복과 영광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그 위에 다른 복을 부어도 복이 복인 것을 알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소명을 깨달아 알고 그 소명을 위해서 나에게 무엇을 도구로 주셨는지 알지 못하면 하나님의 은사는 자신의 손 안에서 소멸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기도는 집증적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머물고 있는 교회와 성도의 마음 안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만세전부터 있으되 그것을 알아 깨달을 때 인간의 믿음 안에서 활성화됩니다. 이미 주신 소명과 은사와 축복이 있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그것을 깨달아 알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를 주면 열을 아는 사람이 있다지만 열을 주어도 하나조차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문제는 이미 있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청년 시절 제임스패커의 『하나님의 아는 지식』(God Knowing)이라는 책을 필독서로 돌려가며 읽었습니다. 그것은 원래 신학논문이어서 쉬운 책은 아니었지만 신앙의 초기에 뼈대만들기에 유익한 책이었습니다. 틈나는대로 좋은 책을 골라서 읽어두면 영적 골다공증을 예방할 수 있습니다. 패커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바꿀 수 있을까라고 질문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안다고 할 때에는 존재를 인지한다는 말과 인격적 교제로서 안다는 말이 다 가능합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도 있더라고 말한다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겠지만 그 말씀이 나에게 이러한 의미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패커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각 사람의 묵상과 기도 안에 들어와야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인간이 하나님에 대하여 비판적일 수 있는 지식이지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인간에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하는 지식입니다. 그래서 칼뱅은 『기독교 강요』에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나를 알지 못하고 나를 알지 못하면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다시 바울의 전제를 들어봅시다. 하나님이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셔서 우리로 하나님을 알게 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라고 했습니다. 절박한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의 눈을 밝혀주셔서 말씀을 읽을 때 하나님의 지혜로 읽고 그것에서 메세지를 찾아낼 수 있게 됩니다. 피상적으로 읽고 듣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도록 말씀을 마음에 머물러 두어야 합니다. 선비가 밤새 몸을 흔들어가면 노래하듯이 글을 읽지만 그렇게 읽기만 한 사람은 과거시험에 급제할 수가 없습니다. 시험에서는 천자문을 암송하는 것이 아니고 외우고 익힌 글로 시를 지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글과 세상을 다 알아야 시를 지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재생산이 안되면 아는 것이 아니라고 간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알아가는 것을 멈추면 믿음은 엉뚱한 길로 빠져버립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저희를 치고 내 입의 말로 저희를 죽였노니 내 심판은 발하는 빛과 같으니라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호세아 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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