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6:10-17
6:10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6:11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6: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6: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6:15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6: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6: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오늘은 큐티 묵상 업로드가 늦어졌습니다. 매일 읽어주시는 분들에게 죄송합니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말합니다. 신앙은 보이지 않는 것에서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싸움이 있습니다. 신앙은 영적전투입니다. 신앙이 전투라면 전투력이 필요합니다. 전투에서는 무장하여 대항하지 않으면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에베소서의 전신갑주를 이해하면 악한 영과의 전투에 무엇이 필요한지, 뒤집어 말하면 신앙의 추구해야할 가치가 무엇인지를 알 것입니다. 오늘 큐티를 하지 않고 글을 써서 올리지 않으면 영적 싸움에서 지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저녁이지만 늦게 올립니다.

 

첫째 전투력은 진리의 허리띠로 허리를 동이는 것입니다. 이 허리띠는 바지 허리띠가 아니고 레스링선수들이 힘을 모이기 위해서 착용하는 넓고 단단한 벨트입니다. 벨트를 졸라맬 때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이빨도 깨물게 됩니다. 관용구로 긴축경제에 들어갈 때 허리를 졸라맨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 것에는 반드시 다짐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성도는 거짓없이 진실한 삶을 살 것을 다짐을 해야 합니다. 진리라는 말을 종교적 추상성 안에 두지말고 진실이라는 말로 번역한다면 뜻은 더 명료해집니다. 우리의 삶이 항상 진실할 수는 없어서 혹 거짓이 섞이더라도 다시 진실로 돌아오는려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자신의 거짓을 인정하는 진실한 다짐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진리를 위한 영적인 전투력입니다. 인간은 거짓없이 완벽하게 살 수는 없습니다. 진실을 지키기 위해서는 거짓을 고백하고 책임지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진실하지 않은 삶에 자유가 없다는 역설이기도 합니다. 진실하게 살기로 다짐하며 허리띠를 메십시오.

 

두번째 전투력은 불의를 막아 서서 버텨내야 하는 능력입니다. 정의의 흉배입니다. 가슴은 심장을 품고 있어서 갑옷 중에도 가슴 부분은 가장 단단한 재질로 만들어야 합니다. 정의를 지켜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따르는 성도는 부정한 욕망에 끌려다니지 않는 공평하고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교회와 성도는 불의의 이익을 나누는 곳이 아니고 정의를 위해 희생하고 그것을 위해서 손해 볼 것을 각오를 해야 하는 곳입니다. 그것을 노력해본 사람이라면 정의롭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알 것입니다. 정의로운 사고는 할 수 있으나 정의롭게 사는 것은 별개입니다. 자신에게 엄격한 규칙을 적용하지 않는 정의는 곧 위선이 되어버립니다. 단단한 것으로 정의의 흉배를 갖추십시오.

 

셋째 전투력은 평화의 신발입니다. 로마 신화에서 평화의 신은 팍스였습니다. 그래서 로마는 팍스 로마나라는 이름으로 세계를 지배하려고 했습니다. 슬로건은 그랬습니다. 그러나 로마의 힘에 복종하는 사람에게는 평화를 주지만 저항하면 철저한 폭력을 가하여 가루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로마의 평화입니다. 밟은 자에게는 평화이지만 밟힌 자에게는 공포였습니다. 일본의 화(和)정신은 진정한 화평을 이루는 의미의 평화가 아닙니다. 간단히 예를 들어 설명한다면 일본제국주의가 이웃나라를 침락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혹 일본인 중에 그것이 이웃의 평화를 해치는 일이라고 반대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는 곧 화(和)에 반하는 사람, 평화의 적이 됩니다. 그래서 일본의 화(和)정신은 전체주의적 일치와 다르지 않습니다. 일본의 화(和)는 국민정신을 동원하는 국가주의와 전체주의의 도구입니다. 일본인이 자기 주장에 약하고 민주주의에 약하고 말을 둘러서 하는 이유는 그 전체주의 안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팍스 로마나와 일본의 화(和)는 두려움이라는 것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믿음의 평화는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전도지로 내보내시면서 어느 집에 들어가 머물든지 그 집의 평화를 빌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남의 사찰에 들어가 땅밟기를 하고 밟은 땅을 교회에게 달라고 하는 것이 영적 전쟁이 아닙니다. 불상의 목을 부러뜨리는 것이 우상을 파괴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 전투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화평케 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화평도 싸워야 이룩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전투력은 자신과 먼저 싸워야합니다. 우리의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샬롬이 전해져야 하는 것이 진정 평화의 군사들이 보유해야 할 전투력입니다.

 

네번째 전투력은 방패의 힘입니다. 믿음의 방패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곧 성도의 방패입니다.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이 방패를 가진 믿음이 악한 자의 화전 즉 불화살을 다 막아냅니다. 영적 싸움은 홀로 영웅처럼 싸워서 하나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 보호와 공급 안에서 싸워야지만 이길 수 있습니다. 마귀의 능력은 우리의 것보다 강합니다. 유혹에 질 수 밖에 없고 그것을 반복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길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방패는 적의 공격을 방어하는 도구이지만 전략상 후퇴할 때에도 필요하고 그 자리에 버티고 견뎌야 할 때도 필요하고 전진해야 할 때도 방패는 필요합니다. 약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방패를 들 것입니다. 방패없이 혼자 앞으로 나가는 것은 용기가 아니라 항오를 무너뜨리는 구멍이 됩니다. 방패를 들고 대열을 맞추고 전진과 후퇴를 함께 해야합니다.

 

다섯번째 전투력은 투구입니다. 구원의 투구입니다. 전투상황이 아니더라도 교통상황에서 몸을 지키는 헬멧은 여전히 우리 일상에 유효합니다. 머리는 신체의 다른 부위보다 노출이 잘 되어 적의 공격을 받기 쉽고 작은 충격에도 치명상을 입을 수도 있는 것이 머리입니다. 제일 중요하면서도 약한 머리를 지켜야 합니다. 영적 전쟁이라고 해서 다 신비의 영역 안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머리를 지키는 투구가 필요하다는 것은 생각과 사고를 지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행동은 머리가 지배합니다. 따라서 머리는 제일 중요한 부분이며 악한 것의 주요 공격대상입니다. 악한 것은 우리의 머리에 물리적 타격을 입히는 것이 아니라 생각의 변화을 유도합니다. 의심과 불만과 걱정으로 구원의 확신에서 이탈시켜려고 하는 생각들입니다. 몰라서 속는 것이 아니라 잘 못 알아서 속는 것입니다. 사탄은 온갖 거짓된 이론과 사상으로 그리스도인들의 지성을 공격합니다. 하나님이 없는 지적 작업에는 구원의 지혜가 없습니다. 사탄의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의심을 가지도록 하고 구원에 대한 확신을 약화시키려고 합니다. 고린도후서의 말씀이 생각납니다.「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고린도후서10:3-5」외부의 지식을 두려워하거나 배척하지 말고 받아들이되 믿음의 지식의 뿌리를 깊이 내려야 합니다. 그래야 분별과 통찰을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에서는 구원의 투구를 「소망의 투구」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지식은 문자를 분해하는 도구가 아니고 소망을 알아가는 영적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전투에 임한 군인이 승리에 대한 소망, 즉 최종승리라는 구원의 확신이 없다면 승리는 둘째치고 적에게 투항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지금 밀고 밀리는 접전에서 패배하는 일이 있더라도 기어코 최종 승리할 것을 믿고 싸우는 소망을 가진 군사가 되어야 합니다. 작은 실수로 사기가 꺽여서는 안됩니다.

 

마지막 여섯번째 전투력은 공격형입니다. 칼을 들어야 합니다. 싸우려는 사람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져야 합니다. 칼은 날이 서서 필요할 때 적을 공격하는데 사용하는 무기가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칼이라도 칼집에 보관되어 있는 칼은 전투력과 상관이 없습니다. 장농 안에 보관된 운전면허증과 책장에 꽂혀 있는 성경책은 필요할 때 소용되지 않습니다. 그것의 날을 세워 언제 어디서라도 적의 공격기도를 좌절시키고 자신과 공동체를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군대에서 훈련을 위해 공포탄을 사용하는데 그것은 소리만 요란하고 총알은 없습니다. 공포탄을 많이 사용한 훈련용 소총은 수명이 짧습니다. 실탄을 사용하는 소총은 실탄이 총열을 깨끗하게 닦으내면서 발사되기 때문에 기능이 살아 있지만 공포탄은 실탄이 나가지 않아서 화약찌꺼기로 항상 더럽고 고장을 자주 일으킵니다. 우리는 말씀을 공포탄으로 사용하지는 않습니까? 소리만 요란하고 내실이 없으면 안됩니다. 실탄처럼 날카로운 검처럼 틀림없는 상황에 틀림없는 말씀으로 공략해야 합니다. 영적전투 상황에서 실제적으로 사용하는 말씀이 우리 머리와 입술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일을 계속해야 합니다. 실제상황이 발생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군대 내무반에 총기보관대 앞에는 총기를 애인같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전투력을 기르려면 총기를 애인처럼 소중히 여기고 그리고 그것이 보고싶어서 항상 가까이 두고 싶어져야 합니다.

 

이 전투력은 개인이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에베소의 공동체에게 하고 있는 말입니다. 영적 전투는 부대가 하는 것입니다. 각개전투가 아닙니다. 교회 공동체가 함께 싸워야 성도가 살 수 있고 성도가 무장해야 교회가 살 수있습니다.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악한 영들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 현실 속에서 버텨낸다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전투력이 미약한 동료들이 넘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대 전투력을 증강시켜야 합니다. 포로도 데려오고 인질도 데려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악한 것들 앞에 진실과 정의와 평화와 믿음과 구원의 소망과 말씀의 능력으로 버티고 서서 그들의 유혹과 위협 앞에서 당당한 군사들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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