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年12月22日 クリスマス礼拝
「クリスマスの目的」
「크리스마스의 목적」
ルカによる福音書 15:4-7
누가복음 15:4-7
趙鏞吉 牧師
조용길 목사

메리 크리스마스! 오늘은 누가복음의 2장14절로 기쁨의 인사를 나누면 좋겠습니다.
2:14 「いと高き所に、栄光が、神にあるように。地の上に、平和が、御心にかなう人々にあるように。」
2: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이 말씀으로 서로 축복 인사를 합시다.”하나님께 영광을, 사람들에게는 평화” 하나 더 인사합시다. “당신에게는 구원을”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영혼에 구원이 있는 크리스마스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사복음서를 자세히 읽어보셨습니까? 사복음서는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입니다. 사복음서를 읽다 보면 서로 중복되는 내용이 있는가 하면 좀 다르게 기술하고 있는 내용도 있습니다. 그것이 조금씩 다른 이유는 이것을 쓴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네 명이 가지고 있던 예수님에 대한 1차적 자료가 다르고 그 기억도 조금씩 다르고 말하고자 하는 관점도 조금씩 달랐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마태복음은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관점을 가지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아침 주일학교 설교본문은 마태복음이었는데 별을 쫓아 온 동방박사가 왕으로 나신 예수님께 황금과 유황과 몰약을 드리고 예배합니다. 그러나 마가복음에는 그런 내용이 안나옵니다. 마가복음은 섬기러 오신 예수님, 즉 종으로 오신 예수님을 드러냅니다. 마태복음과 서로 다릅니다. 그렇다면 누가복음의 관점은 무엇입니까? 인자, 즉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을 전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요한복음은 하나님으로서의 예수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 다르지요. 그렇다면 누가 제대로 쓴 것입니까? 누구의 관점이 가장 정확합니까? 아무도 틀리지 않았습니다. 성경의 저자인 성령입니다. 하나님입니다. 저자이신 성령은 네 명의 기자의 개성과 경험을 통해 예수님을 기록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복음서를 통해서 예수님을 입체적으로 알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궁극적인 통치자이신 왕이십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사람이 되셨고 섬기기 위해서 대신해서 피 흘려 죽으신 분입니다. 잘 생각해보시면 크리스마스가 되면 유난히 누가복음의 말씀이 많이 등장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크리스마스는 단순히 예수님의 생일을 축하하는 날이 아니고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날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누가복음의 관점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인자,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에 대한 것입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는 예수님의 탄생이니까 크리스마스가 되면 누가복음의 아기 예수 탄생 이야기가 늘 등장합니다. 그 누가복음의 메세지를 압축하여 대변하는 것같은 말씀 한 구절이 있는데 소개하겠습니다. 누가복음 19장 10절 말씀입니다.

19:10 人の子は、失われた人を捜して救うために来たのです。
19:10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누가는 예수님이 사람이 되어 오신 것은 잃어버린 것을 찾아서 구원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의 배경은 삭개오 이야기입니다. 삶의 목적이 오직 허망한 돈에만 집중되어 있던 삭개오, 세리였습니다. 불의한 방법으로 돈에 집착하고 사람들에게서 거절받던 삭개오라고 하는 한 인간이 예수님을 만나고 회개했을 때, 그 때 예수님이 삭개오를 구원하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님이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의 잃어버린 것을 찾아서 원래의 자리로 돌려놓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19:10 人の子は、失われた人を捜して救うために来たのです。
19:10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이 말씀이 누가복음의 주제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성경전체의 핵심을 관통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기어이 잃어버린 것을 찾아내시는데 그것이 우리가 말하는 구원입니다. 내가 믿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찾아내신 것입니다. 그 구원을 받은 사람들의 기쁨의 축제가 크리스마스입니다. 원래 전통적으로 교회는 크리스마스가 되면 누가복음의 아기 예수님 탄생이야기보다 요한복음1장 말씀을 예배 중에 낭독했습니다. 요한복음의 관점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이신 예수님입니다.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이시지만 그분은 동시에 완전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저도 오늘 요한복음을 낭독해 보겠습니다.

1:1 初めに、ことばがあった。ことばは神とともにあった。ことばは神であった。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1:2 この方は、初めに神とともにおられた。
1: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1:3 すべてのものは、この方によって造られた。造られたもので、この方によらずにできたものは一つもない。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1:4 この方にいのちがあった。このいのちは人の光であった。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1:5 光はやみの中に輝いている。やみはこれに打ち勝たなかった。
1: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1:9 すべての人を照らすそのまことの光が世に来ようとしていた。
1:9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1:10 この方はもとから世におられ、世はこの方によって造られたのに、世はこの方を知らなかった。
1: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1 この方はご自分のくにに来られたのに、ご自分の民は受け入れなかった。
1: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1:12 しかし、この方を受け入れた人々、すなわち、その名を信じた人々には、神の子どもとされる特権をお与えになった。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13 この人々は、血によってではなく、肉の欲求や人の意欲によってでもなく、ただ、神によって生まれたのである。
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1:14 ことばは人となって、私たちの間に住まわれた。私たちはこの方の栄光を見た。父のみもとから来られたひとり子としての栄光である。この方は恵みとまことに満ちておられた。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18 いまだかつて神を見た者はいない。父のふところにおられるひとり子の神が、神を説き明かされたのである。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이 말씀이 실현된 날이 크리스마스입니다. 아담이 에덴 동산에서 유혹을 받아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3:9 神である主は、人に呼びかけ、彼に仰せられた。「あなたは、どこにいるのか。」
3: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은 아담을 찾아 불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담이 어디에 있는 지 몰라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아담은 범죄한 후에 동산 나무 사이에 숨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부르신 것입니다. 죄는 어두움이어서 죄 지은 인간은 빛이신 하나님 앞으로 나오기를 싫어합니다. 피곤해서 예배에 나오기 싫은 것이 아닙니다. 자기 영이 스스로 알기 때문에 어두움에 지배당하고 나면 하나님 앞에 나가고 싶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숨고 그러나 하나님은 찾으십니다. 오늘 설교는 마구간에서 태어나시는 예수님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그 태어나신 이유, 누가복음 15장의 잃어버린 것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공감해 보시겠습니다.

지난주 한국에 다녀왔습니다. 공항에 내려서 한국체제기간 동안에 사용할 유심을 하나 사고 택시를 탔습니다. 아직 휴대폰에 유심은 끼워 넣지 않았기 때문에 휴대폰은 아직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택시 안에서 잠시 졸았는지 휴대폰을 손에 들고 있다가 바닥에 떨어뜨린 모양입니다. 집에 돌아와보니 휴대폰은 없었습니다. 택시는 이미 떠나고 없었습니다. 평소 안 하던 현금결제를 했기 때문에 차적조회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먹통이니 누가 주워서 전화를 해줄 수도 없고 제가 전화를 해봐도 전화기는 울리지도 않습니다. 어두운 택시 안에 검은 카펫트 위에 떨어진 검은 휴대폰은 보이지도 않고 울리지도 않을 겁니다. 유심은 끼워보지도 못한 채 가방 안에 그대로 있었습니다. 제가 쓰는 카카오톡은 노트북에서도 쓸 수 있어서 노트북을 열었는데 조작을 잘못해서 그마저 휴대폰 인증이 안되면 노트북에서도 쓸 수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휴대폰을 잃어버렸는데 휴대폰 인증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 순간 카카오톡이 저를 완전하게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았습니다.

1분을 아껴서 바쁘게 다니려고 한국에 왔는데 연락처가 완전히 사라지고 연락할 방법도 없었습니다. 저는 섬처럼 고립되었습니다. 경찰청 분실센터에 신고를 했습니다. 찾을 수 있는 방법은 누군가가 발견해서 파출소에 가져다 주는 것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누군가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누군가가 내 전화기를 발견해야 하고 그것을 경찰서로 가져다 주어야 내가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경찰은 내 휴대폰을 찾으러 나가지 않습니다. 일상에서 걸어 다니고 있는 누군가가 내 휴대폰을 찾아서 파출소에 가져다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돌아와 준다면 잃어버린 사람은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그래서 온통 관심은 그 잃어버린 것을 찾아주는 누군가였습니다. 그 사람을 기다렸습니다. 휴대폰을 기다렸다기 보다 그것은 찾아주는 그 누군가를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휴대폰은 어딘가에 분명히 있습니다. 이 세상에 확실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다만 제가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를 모를 뿐입니다. 그 존재가 제 역할을 하려면 저에게 돌아와야만 합니다. 제가 그 휴대폰을 사용할 때 휴대폰은 자기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휴대폰을 위해서 기도해봐도 휴대폰이 혼자서 걸어오지는 않았습니다. 사람의 손을 거쳐야 합니다.

모든 연락과 일정이 멈추고 멍하니 집에 있었습니다. 덕분에 어머니하고 밥 먹고 집에 고장난 것도 이것 저것 고쳤습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게 그렇게 어렵나… 주워서 파출소에만 가져다 주면 되는데…그것만 해주면 되는데…우체통에만 넣어도 찾아준다는데….내 휴대폰을 안 찾아주는 사람들이 서운했습니다. 원망스러웠습니다. 그런데 또 문득 이런 생각도 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하시는 것은 아닐까? 하나님이 잃어버리신 것이 내 주위에 많이 있습니다. 내가 차를 타고 갈 때도 내 주위에 있고, 내가 일하고 있을 때도 나와 함께 있고, 내가 밥을 먹을 때 내 옆에 있는 사람들 중에 하나님이 잃어버리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애타는 것은 잃어버린 그것이기도 하지만 그 잃어버린 것을 알고 있고, 그것을 보고 있고, 그것을 만지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에게로 되돌려 주지 않는 나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다는 것을 깨닫았습니다. 내가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찾아서 제자리로 돌려주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텐데, 파출소에 가져다 주는 수고만 해주면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 텐데…

교회로만 데려오면 그 길이 열리기 시작할 텐데 우리는 그 작은 수고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사람만 애가 타는 겁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하나님은 잃어버린 죄인 하나가 옳은 데로 돌아오면 하나님이 어떻게 기뻐한다고 하셨습니까?
15:7 …ひとりの罪人が悔い改めるなら、悔い改める必要のない九十九人の正しい人にまさる喜びが天にあるのです。
15:7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하나님은 잃어버린 것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까? 죄인 한명이 회개하고 예수님께 돌아오면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 명 때문에 기뻐하는 것보다 더 기뻐하신답니다.

우리의 하루는 바쁩니다. 오직 관심은 나 자신에게만 있어서 잃어버린 사람의 애타는 마음을 알 길이 없고 또 잃어버려서 방황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불쌍한 마음을 가지지 않습니다. 오늘 다섯분의 형제 자매님이 세례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잃어버린 자녀 다섯분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 다섯분 중에 한 분은 저의 어릴 적부터 절친한 친구의 어머니입니다. 그리고 오늘 예배에는 한국에서 저의 어머니도 와 있습니다만, 저는 사춘기 방황을 심해서 비행의 시간을 지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저는 가출을 했습니다. 가출할 때 친구 몇 명을 꼬드겨서 함께 가출을 했습니다. 오늘 세례 받으시는 분은 제가 꼬드겨서 같이 가출한 친구 중 한 명의 어머니입니다. 그러니 이분에게 있어서 저는 나쁜 친구였습니다.

그런데 인생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저는 비행을 후회하고 재수해서 대학에 갔고 다시 일본으로 유학을 왔습니다. 친구 어머니는 저보다도 빨리 일본으로 이주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쁜 친구는 일본에서 예수님을 믿고 목사가 되었고 친구의 어머니는 나쁜 친구가 목회하는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신앙을 고백하고 오늘 드디어 세례를 받으십니다. 오늘 세례 집례는 그 나쁜 친구인 제가 합니다. 저는 올해 목사 안수를 받았으니까 저에게도 첫 세례식이 되기도 합니다. 오늘 세례를 받으시는 저의 친구의 어머니와 저의 어머니는 누구보다도 오늘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아실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집나간 아들이 돌아온 날의 그 안도의 기쁨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사실 가출했던 우리는 스스로 집으로 돌아온 것이고 아니고 저의 아버지에게 잡혀왔습니다만 저도 기억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돌아왔던 제 방에 먼지 한 톨 없던 것을 기억합니다. 아들이 집을 나가서 연락도 안되던 시간동안 어머니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들의 방에 들어가서 걸레질을 하는 것 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 때 방은 어머니의 눈물로 닦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지난 주에 휴대폰을 잃어버렸다는 말을 듣자마자 어머니는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아들을 잃어버렸을 때는 예수님을 몰랐고 기도할 줄도 몰랐으니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하나님이 잃어버린 자녀를 찾으시는 마음이 그렇습니다. 제가 일본에 와서 예수님 믿고 어머니에게 이렇게 편지를 써 보낸 적이 있습니다. “어머니도 집 나간 것은 마찬가지니까 어서 예수님 믿고 돌아오시라”고….감사하게도 그 기도는 이루어진 것 같습니다. 가족과 이웃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것을 전도라고 하지요. 그 전도라는 것이 하나님이 잃어버린 자녀를 찾으시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믿는 자의 증거의 입술을 통해 구원받을 자를 찾으십니다.

コリントⅠ1:21 …神はみこころによって、宣教のことばの愚かさを通して、信じる者を救おうと定められたのです。
고린도전서1:21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이탈해서 방황하는 것에 대한 긍휼함, 아이를 잃어버린 부모의 애타는 마음에 조그만 관심을 가지면 그 잃어버린 것을 제자리로 돌려줄 수 있습니다.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은 주인은 기쁨을 누리고 제자리로 돌아간 것은 평안을 누립니다. 오늘 세례식은 저절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아 주신 분들이 계십니다. 직장에서 일상에서 작은 친절과 사랑을 베풀고 교회로 권면하고, 또는 가족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해왔던 그 믿음이 이 세례식 뒤에 있습니다.

ダニエル12:3 …多くの者を義とした者は、世々限りなく、星のようになる。
다니엘12:3…많은 사람을 옳은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이 사랑의 수고를 하신 분들에게 다니엘12장 3절의 은혜가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내는 것, 떠나왔던 아버지 집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 그것을 위해 크리스마스가 있습니다. 크리스마스는 그것 때문에 존재합니다. 이제 휴대폰은 못 찾아도 좋습니다. 2019년이 다시 돌아오지 않아도 좋습니다. 새롭게 2020년을 주실 테니까 내년에는 이 동경에서 방황하고 있는 잃어버린 하나님의 자녀들을 찾아옵시다. 하나님이 가장 큰 영광을 받으시는 것은 영혼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일입니다. 그리고 인생이 가장 평안해지는 것은 돌아갈 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입니다. 길을 잃은 사람들에게 구원의 소망이 되는 크리스마스이기를 소원합니다. 그 길을 안내하는 성도들에게 영혼구원의 소명을 다시 확인하는 크리스마스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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