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
8: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8:33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8: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8:35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8: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8:37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8:38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8:39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것이어늘
8:40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8:41 너희는 너희 아비의 행사를 하는도다 대답하되 우리가 음란한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분 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8:42 예수께서 가라사대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 나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8:43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줄 알지 못함이로다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 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8:45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8:46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매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8:47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은 많이 인용되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인용하려면 진리와 자유가 정의되어야 할텐데 진리가 무엇이며 그 진리가 주는 자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우리는 말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진리를 설명할 수 없다면 지적이고 영적인 허세가 될 것이고 실증적인 자유를 내보이지 못한다면 위선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식하려고 하지 않는 언어는 오히려 생각을 억압합니다. 인식을 확장하려고 하지 않는 기계적인 신념의 반복은 마치 주문 (呪文) 같은 것이 되어서 자유에서 멀어질 뿐이다.

 

사람들은 자유에 관심이 많습니다. 경제적 자유와 그것을 실현하게하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자유, 자신에 대한 자유,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던 외침은 어느 시대에도 낯설지 않는 것입니다. 자유가 없이는 인간다움을 실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도 자유라는 전제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종교가 획일화된 전체주의가 되면 그 종교는 이미 신앙의 힘을 잃어버립니다. 인간을 종교라는 틀에 가둘 수는 있어도 자유가 없이는 신앙의 힘을 발휘하게 할 수 없습니다.

 

교회가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은 기독교 국가입니다. 기독교 국가라는 것은 곧 신앙을 정치 권력에 복속시키겠다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 교회를 정치 세력화하고 그것이 기독교의 입지를 지키는 것이라는 무식한 선동에 속아서는 안됩니다.

 

진정으로 교회가 추구해야 할 것은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는 민주사회입니다. 종교 사회인 유대가 율법을 도구로 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하나님을 오해시키고 질식시키고 있는지를 우리는 읽고 있지 않습니까?

 

개혁은 현상에 대한 반대가 아니고 본질으로의 회복입니다. 예수님의 개혁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고 완성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율법의 본질로 돌아가려는 사람들이 있었다면 유대에도 희망이 있었을 것입니다. 본질로 돌아가려면 본래적 의도를 알아야 할 것이고 그것이 어떻게 왜곡되어 왔는지에 대한 역사적 이해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역사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의도는 무엇이었고 교회는 그 말씀을 어떻게 해석해 왔는가라는 문제의식입니다.

 

복음이 세상의 빛이 되지 못하고 종교가 세상을 암흑으로 만들어버린 중세 말기에 르네상스가 일어났습니다. 르네상스는 인간과 세계를 고민한 고전을 찾아 읽기 시작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고대 그리스어를 알아야 했습니다.

 

르네상스의 시대에 지식인들은 그리스어를 공부했고 교회는 그리스어로 된 원전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원래의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나니 현재가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았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이 일어났습니다.

 

종교개혁은 가톨릭이 미워서 일어난 것이 아니고 본래의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의 외침은 Sola Scriptura (오직 말씀) 이었습니다.

 

인간성 회복이 없이는 종교는 본질을 잃고 왜곡될 수 밖에 없습니다. 역사 안에 있었던 오류를 정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본래의 의도된 것으로 돌아가려는 의지가 우리를 진리 앞으로 한발 더 다가가게 합니다.

 

예수님은 오늘 말씀에서 죄의 종이라는 표현을 쓰셨는데 이것에는 죄에게 복종하는 인간의 자유 의지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죄를 범한 결과가 인간성의 파괴이기 때문에 치명적인 것입니다. 인간성, 즉 사람됨이 파괴된 종교는 하나님의 사랑을 담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니 정말 자유해졌습니까? 그렇게 말하라고 강요하는 맹목적 종교에 저항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자유가 확보될 때까지 진리를 찾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아는 조건을 제자라고 하셨고 많은 제자 중에 참 제자는 내 말에 거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말씀에 거하는 사람이 참 제자이고 그런 사람이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진리는 열매처럼 자유를 맺습니다.

 

진리의 힘은 본질을 꿰뚫고 회복하는 것이고 오해되고 왜곡된 것을 찾아 바르게할 수 있는 지식과 용기를 가집니다. 지식과 양심이 선한 상태로 돌아갈 때 자유가 주어집니다.

 

자유란 하나님의 말씀을 체화해 가면서 점진적으로 해방을 체험하는 과정입니다. 그런 자유로의 체험의 과정에는 상실도 있고 포기도 있어야 합니다.

 

팀 켈러는 자유에 대해서 정의하기를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제약과 잃어야 할 것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선택은 자유이지만 선택에 의해서 상실되는 것도 자유의 책임이니까요.

 

양문 옆에 38년된 병자는 사회적 회복이라는 자유를 위해 자신을 고쳐준 예수를 고발하고 가버렸습니다. 반면에 요한복음 9장에는 태어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사람은 사회적 불이익을 감수하고 자신의 예수님을 당당하게 증거합니다.

 

결과적으로 38년된 병자는 그 사회로 편입되었고 고침받은 소경은 예수님을 증거한 댓가로 이스라엘 사회에서 추방되었습니다. 누구에게 자유가 주어졌습니까? 사회적 이익이 진리인 사람은 38년된 병자가 자유를 찾았다고 할 것입니다. 진리를 보았으나 누구는 비겁하였고 누구는 자유하였습니다.

 

이 자유를 확보하지 않고는 진실과 진리라는 것을 지킬 수 없습니다. 우리가 별 생각없이 사용하는 「세상」이라는 말도 종교적으로 관념화되어 버린 말이기도 합니다만 그 「세상」이라는 말을 「사회 구조」라고 바꾸어 봅시다.

 

이 사회의 구조에 노예화되어 있는 사람은 진리를 알아도 숨겨둡니다. 그래서 진리가 저기 있어도 여기서 자유를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말씀하시듯 참 제자가 아닙니다.

 

자유롭다고 우기지 말고 자유가 주어질 때까지 진리를 찾아가야 하겠습니다. 말씀 안에 거하십시오. 이 표현도 관념적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묵상하고 그것에 삶을 복종시키십시오. 자유로워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