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

신명기3:23-29
3:23 그 때에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3:24 주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크심과 주의 권능을 주의 종에게 나타 내시기를 시작하였사오니 천지간에 무슨 신이 능히 주의 행하신 일 곧 주의 큰 능력으로 행하신 일같이 행할 수 있으리이까
3:25 구하옵나니 나로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편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 하되
3:26 여호와께서 너희의 연고로 내게 진노하사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내게 이르시기를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3:27 너는 비스가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동서 남북을 바라고 네 눈으로 그 땅을 보라 네가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할 것임이니라
3:28 너는 여호수아에게 명하고 그를 담대케 하며 그를 강경케 하라 그는 이 백성을 거느리고 건너가서 네가 볼 땅을 그들로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3:29 그때에 우리가 벨브올 맞은편 골짜기에 거하였었느니라

 

모세는 40년을 광야에서 고생했지만,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모세의 가나안에 대한 애타는 기도를 하나님은 외면하셨습니다. 오히려 다시는 그런 소리 말라며 못을 박아버리셨습니다.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신광야 가데스에서 물이 없어 백성들 안에서 소요가 일어났을 모세가 지나친 분노를 쏟아냈던 일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명하시기를 백성들 앞에서 지팡이를 잡고 바위에게 명령하라고 하셨는데 모세는 분노한 상태로「내가 너희를 위해 이 바위에서 물을 내랴?」고 소리치며 지팡이로 바위를 두 번 세게 내리쳤습니다.

 

그것은 강력한 카리스마였고 물은 모세의 분노와 함께 백성들에게 공급되었습니다. 모세는 그야말로 경외의 대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해갈은 했지만 모세는 마치 자신이 물을 내줄 수 있는 능력자인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그 사건 이후로 하나님은 모세를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모세의 삶은 파란만장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광야 같은 삶으로 내몰려야 했고 이집트의 왕자가 되어서 살다가 다시 도망자 신세가 되어 광야로 내몰렸습니다.

 

광야에서 부름받아 백성들을 출애굽 했고 사십 년을 다시 광야로 내몰려 고생했습니다. 그리고 끝내 그 광야에서 죽어야 한다는 것은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세의 마지막 운명을 읽으면서 우리는 화내면 안 된다는 말로 교훈을 정리할 수는 있겠지요.
화내지 말고 삽시다. 인생은 사랑하기도 짧으니까요.

 

그러나 모세도 사람인데 화 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눌러 참아야만 하는 것일까요? 오늘 말씀을 묵상하다가 걸리는 것이 있었습니다. 정말 그 실수 한 번으로 모든 것이 박탈된 것일까요?

 

26절에「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모세는 더 이상 이 문제로 기도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그만해도 족하니」라는 말은 이제 충분하니까 더 거론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무엇이 충분하다는 것일까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세가 이것을 가지고 기도를 많이 했고 하나님은 충분히 들었으니 이제 그만하라는 것일까요? 문제는 족하다는 것의 주체가 누군가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충분히 들었다」라는 의미의 족하다 인지 「모세에게 무엇인가가 충분하다」는 의미에서 족하다 인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히브리어 원문을 찾아보면 그만해도 족하니는「라브 라크」
רַב־ (라브)는 족하다라는 의미이고
לָ֔ך (라크)는 네게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만해도 족하니를 다시 번역하면 「모세 너에게 충분하니」입니다. לָ֔ך (라크) 는 분명히 2인칭 단수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많이 들어서 족하다는 의미로 하신 말씀이 아니고 모세 네가 족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족하다는 것입니까? 「사명」입니다. 거기까기 고생했으면 됐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나안을 꿈처럼 그리지만, 가나안 정복과 정착도 고생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가나안이 좋은들 하나님 집처럼 좋겠습니까? 「네 사명으로 인한 광야 고생은 거기까지 충분하니 더는 말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의 바울의 기도와 하나님의 응답을 생각나게 합니다.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달라는 바울의 기도에 하나남은「내 은혜가 너에게 족하다」고 하셨습니다. 충분하다고 하셨습니다.

 

정착하여 안정된 이스라엘 사회를 여전히 모세가 다스린다면 그 사회에는 절대권력화, 신격화가 일어날 소지가 다분합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위해서 그 위험한 곳에 보내지 않았습니다.

 

광야에서 물을 낼 때처럼 모세의 간증은 부풀려지고 그렇게 교육되면서 인간은 권력과 함께 신격화되고 우상화되어져 갈 수 있습니다.

 

사람을 권력 위에 오랫동안 올려놓는 것은 권력자도 망하고 백성도 망하는 길입니다. 모세가 가나안의 대통령이 된다면 하나님이 받으셔야 할 영광의 자리에 사람이 앉게 될지 모르는 일입니다.

 

모세는 어머니가 자기를 갈대상자에 넣어 떠나보내야 했듯이 이제 이스라엘 백성을 떠나보내야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느보산으로 홀로 올라가고 하나님은 사랑하는 모세를 품으로 부르시고 이스라엘은 여호수아가 다음 리더십을 준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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