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

신명기4:15-24
4:15 여호와께서 호렙산 화염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던 날에 너희가 아무 형상도 보지 못하였은즉 너희는 깊이 삼가라
4:16 두렵건대 스스로 부패하여 자기를 위하여 아무 형상대로든지 우상을 새겨 만들되 남자의 형상이라든지, 여자의 형상이라든지,
4:17 땅 위에 있는 아무 짐승의 형상이라든지, 하늘에 나는 아무 새의 형상이라든지,
4:18 땅 위에 기는 아무 곤충의 형상이라든지,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아무 어족의 형상이라든지 만들까 하노라
4:19 또 두렵건대 네가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일월 성신 하늘 위의 군중 곧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천하 만민을 위하여 분정하신 것을 보고 미혹하여 그것에 경배하며 섬길까 하노라
4:20 여호와께서 너희를 택하시고 너희를 쇠풀무 곧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사 자기 기업의 백성을 삼으신 것이 오늘과 같아도
4:21 여호와께서 너희로 인하여 내게 진노하사 나로 요단을 건너지 못하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그 아름다운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리라고 맹세하셨은즉
4:22 나는 이 땅에서 죽고 요단을 건너지 못하려니와 너희는 건너가서 그 아름다운 땅을 얻으리니
4:23 너희는 스스로 삼가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을 잊어버려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금하신 아무 형상의 우상이든지 조각하지 말라
4:24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모세는 이스라엘을 불러 모으고 제일 먼저 우상을 금할 것에 대해서 다시 힘주어 설교하고 다짐을 받습니다.

 

인간은 보이는 것을 의지하므로 보이는 것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그것에 신성을 부여하고 의지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을 수 없는 존재, 그것이 종교적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이 아닌 일월성신의 피조물과 그 피조된 재료로 형상을 만들어 신이라고 이름붙이고 그것에 절합니다.

 

오늘 본몬에서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소멸하는 불이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은 그 피조된 것을 소멸시키시는 불이라는 말입니다.

 

피조물 중에 하나님의 성품을 구현할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만든 것은 하나님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물은 사람이 다스려야 할 대상이지 의지할 대상도 예배할 대상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것에 민감하게 진노하시는 것은 형상을 만들고 그것에 절하고 의지하는 것이 인간 스스로 그 부여해주신 존엄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재하는 다양한 신들 중에 하나님 아닌 다른 하나를 선택했기 때문에 질투하는 것이 아니고 존엄하게 창조된 존재가 실재하지 않는 허무한 것을 의지하고 절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에 대한 절대성과 종교의 다양성의 논쟁을 피해갈 수는 없겠습니다. 근대는 권위를 추구했으나 우리가 살고 있는 탈근대 이른바 포스트모던의 시대는 근대의 가치를 거부하고 해체합니다.

 

보편적 질서와 균형과 조화와 통일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기존의 가치를 조롱하고 권위와 도덕도 배제됩니다. 모든 것은 각자의 감각에 따라 다양성과 특수성으로 이해됩니다.

 

이런 시대적 흐름에서 종교 다원주의가 나옵니다. 구원은 기독교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에도 있고 기독교의 하나님만이 구원의 유일한 길이 아니라는 자유주의 신학 운동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른 신을 섬기지 못하도록 질투하는 하나님은 덜 교양적이고 독단적입니다. 역사적으로 이 유일신론은 다신론과 싸워야 했고 여호와 신앙은 이교도와 양립하지 못하고 싸워야 했습니다. 이 기독교의 독단성을 양보하면 기독교는 포용심 있고 교양있는 종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원주의자에게도 아버지는 반드시 한 명일 뿐일 것이고 아내와 남편도 오직 한 명입니다. 그 외의 것을 허용한다면 그것은 교양이나 포용이 아니고 우주적 질서를 부정하는 이탈입니다. 그것은 참된 인간됨이 아닙니다.

 

남편과 아내는 오직 한 명뿐이고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사랑은 그 안에서만 허용됩니다. 그것조차 다양할 수 있다고 하는 사람들과의 논쟁은 일단 논외로 합시다.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의 유일성과 부부의 사랑의 유일성을 독단이나 독선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요구는 종교적 편협성이 아니고 이러한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혹시 연애할 때 질투 받는 것이 묘하게 기뻐 본 적이 있습니까? 인간의 사랑은 질투하는 사랑입니다. 오직 한 사람과 한 사람 사이에서만 있는 지극히 개인적인 사랑의 은밀함, 그것이 설레임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관념적인 것이 아니고 인격적인 것이어서 질투하십니다. 사랑하는 대상이 존재하지도 않는 허무한 것에 마음을 주고 있는 보면서 사랑과 고통을 느끼는 것이 하나님의 질투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 인격성을 전제한 절대성이 없다면 신앙에 어떤 매력이 있을 수 있고 헌신의 어떤 이유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포스트모던의 시대에 교회는 세상을 향해서 지금보다 더 많이 대화할 수 있는 채널을 열어야 합니다. 인간과 종교를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는 더 많은 다양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내 아버지가 오직 한 분뿐이라는 것을 고쳐서 말할 수는 없습니다. 진정한 다양성은 그 안에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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