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

신명기14:1-21
14:1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자녀니 죽은 자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베지 말며 눈섭 사이 이마 위의 털을 밀지 말라
14:2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택하여 자기의 기업의 백성을 삼으셨느니라
14:3 너는 가증한 물건은 무엇이든지 먹지 말라
14:4 너희의 먹을 만한 짐승은 이러하니 곧 소와 양과 염소와
14:5 사슴과 노루와 불그스럼한 사슴과 산 염소와 볼기 흰 노루와 뿔 긴 사슴과 산양들
14:6 무릇 짐승 중에 굽이 갈라져 쪽발도 되고 새김질도 하는 것은 너희가 먹을 것이니라
14:7 다만 새김질을 하거나 굽이 갈라진 짐승 중에도 너희가 먹지 못할 것은 이것이니 곧 약대와 토끼와 사반 그것들은 새김질을 하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니 너희에게 부정하고
14:8 돼지는 굽은 갈라졌으나 새김질을 못하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니 너희는 이런 것의 고기를 먹지 말것이며 그 사체도 만지지 말것이니라
14:9 물에 있는 어족 중에 이런 것은 너희가 먹을 것이니 무릇 지느러미와 비늘 있는 것은 너희가 먹을 것이요
14:10 무릇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것은 너희가 먹지 말지니 이는 너희에게 부정하니라
14:11 무릇 정한 새는 너희가 먹으려니와
14:12 이런 것은 너희가 먹지 못할지니 곧 독수리와 솔개와 어응과
14:13 매와 새매와 매의 종류와
14:14 까마귀 종류와
14:15 타조와 다호마스와 갈매기와 새매 종류와
14:16 올빼미와 부엉이와 따오기와
14:17 당아와 올응과 노자와
14:18 학과 황새 종류와 대승과 박쥐며
14:19 또 무릇 날기도 하고 기어 다니기도 하는 것은 너희에게 부정하니 너희는 먹지 말 것이나
14:20 무릇 정한 새는 너희가 먹을지니라
14:21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무릇 스스로 죽은 것은 먹지 말것이니 그것을 성 중에 우거하는 객에게 주어 먹게 하거나 이방인에게 팔아도 가하니라 너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에 삶지 말지니라

 

오늘 본문은 장례와 음식에 관한 것입니다. 정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이 지정되어 있어서 그것을 엄격히 지켜야 했습니다. 음식은 민족적이고 종교적인 정체성을 유지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도구입니다. 먹는 것을 통해서 구별된 선민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현대의 성도들에게 이 음식 규례가 문자대로 유효한 것은 아닙니다. 사도행전 10장에서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율법에 정한 부정한 동물을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부정한 음식이라는 이유로 거절했지만, 하나님은 내가 정하다고 한 것을 네가 부정하지 말라고 하시고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이방인인 고넬료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만이 선민이라는 민족적인 정체성의 시대가 끝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서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기회가 주어지는 세계선교사적 전환을 의미하는 사건입니다.

 

이후 바울은 유대인 중심이던 초대교회에 대해서 광범위하게 이 음식 규례를 재해석하고 발신했습니다.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 롬 14:14」 음식이란 먹는 것에 불과하고 음식물 자체가 정결하고 부정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부정한 것이 없지만 사람이 입으로 나오는 것 즉 인간의 말이 부정한 것입니다. 바울은 모든 것은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음식 규례의 재해석이 율법이 가지고 있던 영적인 의미까지 폐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먹는 음식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여전히 구별된 것이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절 「너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에 삶지 말지니라」는 말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에 삶지 말라는 것은 가나안이 풍요를 기원할 때 드리던 풍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미 염소의 젖을 끓이고 그 안에 염소 새끼를 넣어 삶는 것입니다. 어미는 그것을 보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괴기스러운 기분이 듭니다.

 

일본에 와서 오야꼬동(親子丼)의 말뜻을 알고 나서 이와 비슷한 기분이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신명기에서는 어미 염소의 젖을 끓여 그것에 새끼를 삶지 말라고 했지만 오야꼬동은 새끼인 계란을 먼저 풀어 끓이고 그 안에 어미인 닭고기를 넣어서 삶습니다. 연어살 위에 연어알을 놓은 덮밥을 해물오야꼬동(海鮮親子丼)이라고도 하지요. 개인적으로는 다 좋아하는 음식이지만 이름은 그렇게 부르지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했습니다.

 

현대의 그리스도인은 닭고기와 계란 요리를 먹어도 되고 염소고기와 삼겹살을 구워 먹어도 됩니다. 그것이 기독교적 정체성과 규칙에 어긋나지도 않고 비인간적이지도 않습니다. 음식 규례가 가진 율법의 영적인 의미는 염소와 닭에 대한 동물애호적 입장이 아닙니다. 그것을 다루는 인간성에 대한 것입니다. 동물애호가들은 모든 도축을 죄악시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을 먹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염소의 생명을 걱정하시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다루는 인간성의 파괴를 걱정하는 것입니다.

 

닭고기를 생산하기 위해 대량 도살하는 장면을 본 것은 충격적이었습니다. 계란을 낳지 않는 수컷 병아리는 태어나자마자 한해 60억 마리가 도살됩니다. 마블링을 얻기 위해 소에게 지방을 강제로 주입하기도 하고 돼지 무게를 더 나가게 하기 위해 물을 먹여 도살하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개고기를 먹기 위해 기르던 개를 때려서 죽이고 돼지의 목을 따서 죽여 하루종일 죽음의 비명과 신음으로 산야를 뒤덮게 했습니다. 짐승이라도 그 어미와 새끼는 그 죽어가는 비명을 하루 종일 들어야 했지 않았겠습니까. 오래 살겠다는 인간들이 야생 동물과 박쥐를 먹은 이유로 많은 사람들을 죽어가고 있습니다.

 

율법은 이것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여전히 인간성과 피조세계의 질서에 반하는 율법적 규례의 적용대상입니다.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말은 배우 김혜자씨의 책 제목입니다만, 원래 영어 속담에 있는 말입니다. 율법은 인간성을 지키기 위한 꽃인데 그것으로 사람을 때리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음식은 선하고 좋은 것인데 인간의 탐욕으로 그것을 잔혹한 방법으로 다루어서는 안 됩니다. 어찌 새끼 염소에게 먹여야 하는 어미의 젖을 끓여서 그 새끼를 삶을 수 있단 말입니까. 모세의 가르침은 그런 비인간적 방법으로 풍요를 구하는 것을 금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다양한 가치를 말하다가도 결국에는 경제성의 가치로 헤쳐모입니다. 그러나 경제성으로도 인간성을 때려서는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