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

신명기21:15-23
21:15 어떤 사람이 두 아내를 두었는데 하나는 사랑을 받고 하나는 미움을 받다가 그 사랑을 받는 자와 미움을 받는 자가 둘 다 아들을 낳았다 하자 그 미움을 받는 자의 소생이 장자여든
21:16 자기의 소유를 그 아들들에게 기업으로 나누는 날에 그 사랑을 받는 자의 아들로 장자를 삼아 참 장자 곧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보다 앞세우지 말고
21:17 반드시 그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을 장자로 인정하여 자기의 소유에서 그에게는 두 몫을 줄 것이니 그는 자기의 기력의 시작이라 장자의 권리가 그에게 있음이니라
21:18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 아비의 말이나 그 어미의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부모가 징책하여도 듣지 아니하거든
21:19 부모가 그를 잡아가지고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21:20 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거든
21:21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 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의 중에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
21:22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21:23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하나의 문제는 또 하나의 문제를 만들어 냅니다. 죄를 원천봉쇄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죄는 마치 손으로 움켜쥔 물처럼 새어 나가서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킵니다. 하나님은 죄를 억제하는 원칙을 주시는 한편 끊임없이 일어나는 죄와 그로 인한 문제에 대해서 원칙과 권리를 동시에 지킬 수 있는 구체적이고 합리적인 최선의 방법을 주십니다.

 

어제 본문에서는 포로된 여인을 아내로 두는 과정에서 사회적 약자인 여인의 권리를 보호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으로 두 명 이상의 아내를 두게 되는 경우가 생깁니다. 남자들의 욕심이었던 일부다처의 세계에서는 여성과 가정의 고통이 따릅니다. 어느 한쪽은 상대적으로 남편과 가정의 사랑을 받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도 율법이 개입하는데 만약 남편의 사랑에서 소외된 여인이 낳은 아이가 장자일 경우 남편이 더 사랑하는 후처의 자녀가 있더라도 본처의 자녀를 장자로 삼고 상속권을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제는 포로 출신의 후처의 살 권리를 보호했으나 오늘은 사랑받지 못하는 본처의 본래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약자 보호입니다. 가정사라고 하더라도 감정에 의해서 장자권이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개인의 감정이 공동체의 원리를 추월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이어서 패역한 아들에 관한 법이 나오는데 공동체의 원리는 자녀에 대한 징계에 있어서도 유효합니다. 율법은 자녀를 위해서 자녀의 상속의 권리를 원칙으로 정하고 자녀를 비인격적으로 대하지도 않고 그 권리를 보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정의 질서는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이 원칙상의 질서입니다. 자녀가 부모의 말에 순종하지 않고 사회의 기초단위인 가정의 질서를 위협할 경우 이스라엘 부모는 성문으로 가서 자기 자녀를 고소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공동체의 책임을 지고 그 자녀를 돌로 쳐 죽여서 이스라엘 공동체의 질서를 바로 세웠습니다. 현대의 정서로 보면 놀랄 일이고 무서운 일이지만 고대 사람들이 현대의 가정의 질서를 보았다면 놀라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율법이 자녀에 대한 부모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자녀를 포함한 가정과 그 질서를 공유하는 가정들의 집합인 공동체의 질서를 우선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부모가 자녀를 우선하고 특히 내 자녀만을 우선하고 사는 시대에 부모의 권위와 가정의 질서는 해체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미 많이 망가질 대로 망가졌습니다. 자식이 부모를 때리고 죽이는 뉴스가 새삼스럽지도 않은 세상입니다. 이것은 부모와 공동체가 개인사로 분리하여 자녀 개인의 권리를 우선한 결과입니다. 그것이 결코 개인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가정의 통제된 질서 안에서 자녀들은 스스로를 통제하면서 공동체 안에서 유익한 존재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돌로 쳐서 죽이지 않지만,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의 질서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인륜의 질서를 비웃고 부모에게 패역하고 자기 통제를 하지 못하는 사람은 지금도 공동체가 배제해 버립니다. 돌만 들지 않을 뿐입니다. 자녀를 사회에서 건강하게 살게 하려면 교육해야 하는 부모의 권위와 배워야 하는 자녀의 순종의 가치를 놓쳐서는 아닙니다.

 

아무리 노력하여도 죄는 끊이지 않아서 공동체 안에서 죽을죄를 짓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범죄하여 처벌당해 죽었을 경우에 그 시체를 나무에 매달아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줍니다. 그러나 시체를 해가 지도록 나무에 달아두어서는 안 됩니다. 이미 절명했다면 죽은 자의 시체를 존중하여 나무에서 풀어주었습니다.

 

죽은 자에 대한 예의가 없는 세상이야말로 미개한 시대입니다. 이스라엘뿐 아니라 어떤 고대사회에서도 나그네를 대접하고 죽은 자를 정중히 장례 하는 것은 인간성의 기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읽어보면 우리가 사는 시대와의 정서적인 간격이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인간성의 확보과 약자 보호라는 공동체적 질서에 대한 요구는 지금 우리에게도 변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