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

로마서 6:1~11
롬06:0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롬06:0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롬06:0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롬06:0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롬06:0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롬06:0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롬06:0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롬06:0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롬06:0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줄을 앎이로라
롬06:10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롬0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구원의 조건에 있어서 인간의 공로를 추가하려는 것이 율법주의이고 그런 종류의 신학을 공로신학이라고 합니다. 그 안에는 율법을 여전히 구원의 조건으로 유효하게 생각하는 것을 신율주의 또는 언약적 율법주의라고 하고 하나님과 사람이 협력해서 구원을 이룬다는 신인협력주의가 있습니다.

 

신인협력은 말 그대로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과 사람이 협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인협력주의의 입장은 인간이 타락한 것은 분명하지만 완전히 타락하지 않았고 그 영혼 안에 선한 것이 남아 있어서 하나님을 찾아간다고 생각합니다.

 

중세 교회는 그랬습니다. 선한 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엄격한 금욕주의를 시행했습니다. 삶을 버리고 수도원에 들어가서 수행했습니다. 선을 유지하기 위해서 금욕했고 그것에 지치면 신비주의로 흘렀습니다. 신비주의의 추상성에 지치면 다시 경건주의로 돌아가기를 반복했습니다.

 

그러다 16세기 들어서 종교개혁자들의 인간 본성의 이해는 보다 확고했습니다. 칼빈은 인간을 전적 타락으로 이해했습니다. 남김없이 완전하게 타락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교리의 출처는 성경과 역사 전체의 반성일 것입니다. 칼빈은 영혼과 육체를 나누어서 영혼은 선하고 육체는 악하다는 이분법도 반대했습니다. 인간은 구원에 합당한 선의 여지가 남아있지 않은 완전한 타락입니다.

 

이미 5세기에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가 논쟁했었고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로마 가톨릭과 논쟁했던 주제입니다. 이러한 신학적 논쟁은 하나님의 구원과 인간의 삶 사이에서 일어나는 괴리를 이해해 보려는 시도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의 신앙의 현실 안에서 자주 혼란을 일으키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어떤 이는 구원을 얻기 위해 철저히 자신을 속박하며 살고 어떤 이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으니 아무렇게나 삽니다. 아무도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고 말로 하지는 않겠지만 삶이 그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아마도 후자에 가까워 보입니다. 신비를 추구하던 교회에서 도덕이 바닥을 치고 나면 다시 경건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일 것입니다.

 

어제 일요일 큐티 본문 5장 20절에서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 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라고 했습니다. 죄가 더 한 곳에 은혜가 넘쳤다는 말은 죄를 많이 지은 곳에 은혜를 더 많이 주셨다는 말이 아니고 자신의 죄를 깊이 인식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더 깊이 깨닫는다는 말입니다.

 

은혜받기 위해서 죄지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인간의 죄가 어떤 결과를 초래하더라도 죄는 결코 선하지 않습니다. 죄의 자각이 은혜를 깨우치는 도구가 되었다고 해서 죄에게 상을 줄 수는 없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말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죄를 깨달아 은혜를 알게 됩니다. 전적 타락을 깨달아야 전적 구원이 깨달아집니다. 전적으로 자격이 없었습니다. 구원이란 죄 사함입니다. 천국에 오직 없는 것 하나가 있다면 그것이 죄입니다. 그래서 죄에 지친 인간은 매일 천국을 사모합니다. 그것이 구원받은 신앙입니다.

 

죄사함 받은 것이 구원입니다. 그렇게 구원받은 성도는 죄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비록 아직 죄가 덕지덕지 붙어있더라도 그것과 싸우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구원의 조건의 문제가 아니고 구원받은 성도의 방향성의 문제입니다. 믿음도 경건도 모두 중요합니다만, 우리의 신앙이 구원의 기쁨 위에 경건의 기쁨으로 성숙해지기를 기도합니다.